32년간 대법원의 유일한 서사(書士)로 일하며 대법원장 연설문, 전국 법관·법원공무원의 임명장과 표창장을 붓으로 적어온 벽촌(碧邨) 김봉수(60) 대법원 행정관이 연말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다. 대법관들의 공식 행사와 법원행정처의 ‘사법연감’ 제호 등에 쓰였던 그의 글씨는 앞으로 기계가 대신한다. 대법원은 퇴임을 앞두고 지난달 정부포상 대상자로 추천된 김 행정관의 공적을 검증하고 있다.
지난달 말 대법원 별관 3층 서예실에서 김 행정관을 만났다. 묵향 은은한 방에 라디오 소리가 조용히 퍼지는 가운데 그는 일어선 채 ‘국정감사장’ 현판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내년부터는 사법부에서 이 일을 하는 이가 없게 된다”며 “이제 세상 물결이 그렇게 흘러가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 장을 쓰지만, 받는 이에겐 한 장
1982년 사법연수원에 취직한 김 행정관은 84년 2월부터 법원행정처로 옮겨 대법원의 각종 공무와 관련해 붓글씨를 썼다. 서예를 하며 일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나날이 법원의 경구들을 쓰고, 무엇보다도 법관들의 임명·표창 문구를 공들여 쓰며 자부심이 자라났다고 했다.
30여년간 임명·표창장을 몇 장이나 썼는지 물었지만 김 행정관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는 “나도 문득 궁금해 인사과에 문의했지만 모른다더라”며 “어림잡아 2만장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모든 붓글씨에 정갈한 마음을 담았지만, 특히 임명장을 쓸 때에는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는 여러 장을 쓴다. 하지만 받는 사람에겐 한 장이다.” 스스로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고쳐 쓰기도 했다.
평생 한 번 받는 법관 임명장이지만, 꼭 한 명에게는 두 번 써준 일화도 있다. 가보 같은 법관 임명장을 이사 중 잃어버린 한 젊은 판사가 “하나 더 써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해온 것이다. 마침 대법원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한지가 남아 있었고, 김 행정관은 인사과 승인을 얻어 한 장을 더 써줬다. 내년부터 임용되는 모든 법관들은 그의 글씨가 아닌 컴퓨터로 출력된 임명장을 받게 된다.
행백리자 반구십
대법원장들의 연설문을 붓으로 기록한 건 윤관 대법원장(제12대, 93∼99년)이 마지막이다. 연설문 문안이 내려오면 김 행정관은 그를 B5 크기 종이에 세필(細筆)로 적었다. 조사와 어미만 한글로 쓸 뿐 모든 단어를 한자로 적는 게 원칙이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은 그 종이를 대법원장들이 공식 행사에서 펼쳐 읽었다. 특히 인상적인 연설이 있었는지 묻자 그는 “한 자 한 자 안 틀리려고만 애써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달리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명문장들이었다”고 말했다.
김 행정관의 글씨는 대법원의 사법교류와 함께 전 세계로 뻗어나가 있다. 차한성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은 몽골 대법원장의 초청 때 그가 적고 표구한 ‘자유 평등 정의’ 족자를 가져갔다. 일본 최고재판소장이 대법원을 방문했을 때에는 도자기를 선물했는데, ‘청송지본 재어성의 성의지본 재어신독(聽訟之本 在於誠意 誠意之本 在於愼獨)’이라는 김 행정관의 글씨를 새겼다. ‘판결의 근본은 성의이고, 성의의 근본은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이 글귀는 많은 법관의 좌우명인데, 지금 김 행정관의 서예실에도 걸려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들은 ‘국정감사장’ 글씨를 보곤 “전시장에 있어야 할 글씨가 여기에 붙어 있다”고 말했다. 퇴임할 때 그가 이름을 적어준 경조사 봉투를 가져간 대법원장들도 있고, 서예 지도를 청한 대법관들도 있다. 대법관들의 서도를 평해 달라 하자 김 행정관은 “유태흥 전 대법원장(제8대, 81∼86년), 민일영 전 대법관의 글씨가 뛰어났다”고 했다. 그는 “최종영 대법원장(제13대, 99∼2005년)도 글씨가 훌륭하고 서예를 좋아했다. 점심시간마다 손을 잡아드렸다”고 기억했다.
그는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 半九十)’의 자세로 붓글씨를 써 왔다고 공직을 돌아봤다. 백리 중 구십리를 가도 겨우 절반으로 여기며 완벽을 고심했다는 것이다. “변화가 있는 행서·초서가 좋다”는 그는 퇴임에 즈음해 서예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대법원 마지막 붓쟁이… “32년간 표창·임명장 2만장 써”
입력 2016-10-03 0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