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특한 공연예술 장르 가운데 미혼여성들만 출연하는 ‘다카라즈카’가 있다. 1914년 온천 여흥거리로 시작됐지만 100년을 넘긴 지금도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1부 뮤지컬과 2부 쇼로 이뤄진 다카라즈카는 만화에서 막 나온 듯한 무대와 의상, 분장 등을 통해 고유 양식을 구축했다.
일본에 다카라즈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여성국극이 있다. 48년 여성 국악인들이 올린 ‘옥중화’에서 시작된 여성국극은 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60년대 말 서서히 설자리를 잃어갔다. 이후 명맥만 유지하다 90년대 들어 몇몇 1, 2세대 배우들을 중심으로 부활운동이 일어났지만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5∼9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가 무대에 올리는 ‘변칙 판타지’는 미디어아티스트 정은영이 여성국극을 소재로 만든 연극이다. 2000년대 초반 우연히 여성국극 ‘춘향전’을 본 30세 회사원 N이 여성국극 남자역 배우 L의 제자로 입문, 10여년간 노력하다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도망친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정은영은 실제 인물인 N과 L을 통해 여성국극의 판타지와 진짜 이미지를 무대에 구현한다.
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은영은 공연계에선 낯선 인물이지만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매우 주목받는 아티스트다. 여성주의적 미술언어에 천착해온 그는 2008년부터 여성국극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여성국극에 대한 조사와 연구, 전현직 배우들과의 인터뷰, 워크숍 등으로 이뤄진 작업을 바탕으로 영상, 사진, 설치, 공연 등을 선보였다. 그는 이 프로젝트로 2013년 국내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미술상인 에르메스상을 받았다. 최근엔 8년간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일련의 작품과 개념을 정리한 단행본 ‘전환극장’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국극은 반칙은 아니지만 정상도 아닌 ‘변칙’이다.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광복 이후 권번(일제 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 명칭) 폐지 등을 통해 늘어난 여성 명창들이 국악계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서 만든 것이다. 기존 창극의 변칙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쇠락한 여성국극과 그 안에서 꿈 꾸는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판타지를 그려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은 남산예술센터와 일본 요코하마 공연예술미팅(옛 도쿄아트마켓·TPAM)의 공동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앞서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본 요코하마 공연예술미팅은 지난 2월 그를 초청해 다카라즈카 리서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서울 공연을 마친 뒤 내년 2월 요코하마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잊혀진 ‘여성국극’ 연극으로 만난다
입력 2016-10-02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