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CIA가 날 죽이려 해… 미국과 군사훈련 중단”

입력 2016-10-01 04:01 수정 2016-10-03 18:08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남부 다바오에서 “마약사범 300만명을 학살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AP뉴시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미국과 동남아시아를 중시한 전통적 외교 노선에서 친중·친러 외교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처럼 마약범을 학살해 행복하다는 충격 발언을 연일 이어가고 있다.

필리핀 일간지 데일리트리뷴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해 필리핀 교민을 상대로 “CIA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고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는 “필리핀에 죽음을 경고하는 것인가”라며 흥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CIA가 마음에 들지 않은 세계 정상을 이미 수차례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예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원수를 들었다. 그는 하노이 연설 중에도 “대통령 자리를 느낄 시간을 더 달라”며 “대통령이 된 것을 아직 못 믿겠다”고 미국을 비꼬았다. CIA가 자신을 암살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비꼰 것이다.

‘CIA 암살설’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미국과의 군사훈련을 중단하려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꺼낸 말이다. 그는 다음 달 열리는 연례군사훈련(PHIBLEX)이 미국과의 마지막 연합훈련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남중국해 인근에서 실시되는 군사훈련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이 도와도 필리핀은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은 “이번 훈련이 마지막이라는 공식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필리핀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중시’ 전략에 따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리핀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당초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기조로 삼았다. 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근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불거진 미국·유럽연합(EU)과의 갈등을 의식해 방향을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러시아와도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26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에게 ‘미국과의 관계에서 루비콘강을 건너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연내 러시아 방문 계획을 발표하며 “모든 교역과 통상의 길을 열겠다”고 했다. 필리핀의 국가신용도가 하락하고 페소화 가치가 7년 만에 최저치를 찍자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으로 해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이틀간의 베트남 공식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비유해 국제사회에 충격을 줬다. 그는 “마약사범 300만명을 학살하면 행복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히틀러의 사촌’이라고 표현했다.권준협 기자 ga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