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 기자의 샬롬]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예수품에서 저항하다

입력 2016-09-30 20:46 수정 2016-09-30 20:56
영화 ‘밀정’ 포스터
흥인지문 옆 1930년대 동대문교회 기록화
흑백 사진은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가 일경과 맞서며 최후를 맞은 장소의 주택. 아래는 현재 모습이다.
지난 주말. 빨간 바지에 흰 구두를 신은 70대 ‘멋쟁이 노인’이 붉은 벽돌 2층 양옥집 철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를 50m 남쪽으로 두고 있는 골목의 허름한 주택이었습니다. 꽃잎을 떨군 능소화가 그 집 담 위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려. 김상옥 얘기는 들었어. 근데 옆집인줄 알았는데 여기라고? 나는 주인이 아니고 관리자라 잘 몰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36-8. 신주소 실시 전 효제동에 속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는 창신동이었고요.



독립운동가 김상옥(1890∼1923) 의사. 그는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장을 서늘케 한 분입니다. ‘열사’는 의거를 준비하다 그 뜻을 채 이루지 못한 분들을 뜻하는 반면 ‘의사’는 안중근과 같이 결행을 이뤄낸 분들을 지칭할 때 통상 쓰입니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로, 김상옥은 기독교 성도로 신앙 안에서 의를 행한 의사입니다.



‘기독교인 김상옥’의 독립 위한 1인 전쟁

1923년 1월 17일.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새벽이었습니다.

김상옥은 바로 능소화 지는 이 집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일경 1000여명에게 포위되어 더는 저항할 수 없었죠.

“항복하라! 항복하고 나오면 목숨은 살려준다!”

김상옥은 3시간 동안 일경을 상대로 ‘1인 전쟁’을 벌였습니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생겼죠. 그리고 끝내 단 1발의 총알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권총을 자신의 가슴에 겨눕니다.

“하나님이 내게 뜻을 주지 않는구나. 나 김상옥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탕!”

고개를 떨군 김상옥. 그 생가는 바로 윗집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천국의 집을 택했습니다. 조선 구식 군대 무관의 아들로 태어나 동대문교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이 택한 민족의 광복을 위해 무력 투쟁을 벌였던 강골 김상옥. 그는 ‘기대어 피는 꽃’ 능소화처럼 태어나 딱 한 번 기대었습니다. 하나님 품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국권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계해벽두의 대사건진상’이라고 에두르며 김상옥의 경성시내 ‘1인 전쟁’을 호외로 보도했습니다. 순국 장소 사진도 실었습니다. 또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요즘 일제 강점기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 ‘밀정’이 700만명의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밀정’ 첫 장면은 ‘1인 전쟁’입니다. 김장옥이란 독립운동가가 한옥 지붕을 타고 다니며 구연발 브라우닝 권총으로 대적합니다. 종로경찰서 친일 앞잡이 경찰이 그를 잡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요. 일경과 대치하다 끝내 숨진 김장옥. 바로 김상옥의 마지막을 영상으로 담은 겁니다. ‘밀정’은 ‘팩션’이지만 사실(史實)에 충실해 각색한 수작입니다. ‘밀정’ 내용을 글로 재구성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교회 야학에서 정의를 배우다

지난 주말 효제동 김상옥 순교 현장을 취재하고 있는데 옆 고깃집 여주인이 궁금한지 말을 보탭니다.

“에구머니나, 저도 ‘밀정’ 봤는데 그 김장옥이가 김상옥이라고요? 그리고 여기서 돌아가셨다고요? 생가도 그 옆이고요? 놀랍네요. 까마득히 몰랐어요. 다만 우리 식당이 육당 최남선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어요. 큰 한옥이었는데 헐고 일반 건물로 지은 거죠. 건너편 한국기독교회관 등 기독교 관련 단체가 이 주변에 많아요. 목사님 등이 저희 집 최대 고객입니다.”

근대문학의 선구자 최남선(1890∼1957)은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분입니다. 그러나 학병 지원을 권고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수감되긴 합니다만 반민특위 실패와 함께 곧 풀려나고 말지요. 서울시 사사편찬위원회 고문 등을 지내다 편안한 여생을 맞습니다.

‘밀정’에서 일제 경찰 이정출(송강호 분)에 대한 묘사는 최남선과 같은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애증을 극대화한 것이지요.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염원’이라고 봐야겠습니다. 너희가 피조물로서 친일행위와 같은 죄를 짓는 나약한 인간이나 적어도 이제는 민족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겠냐는…오늘 우리는 역사의 죄인들에게 사울의 회개와 같은 삶을 살아줄 것을 이정출을 통해 요구하는 것이지요.

일제 강점기 서울 남산 신사에 고개 숙인 목회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악한 피의 바탕 위에서 지금도 세상 권세를 이어가는 뒤틀어진 현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김상옥은 한국 교회가 키운 애국자입니다. 그는 순교의 현장에서 채 1㎞도 떨어지지 않은 흥인지문 옆에 ‘동대문교회’(지금은 수원으로 이전하고 옛 터만 남아 있다)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그 교회 야학 신군(信軍)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손정도(1882∼1931) 목사가 그 교회 담임이었습니다. 손 목사는 의에 주린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쳤습니다.

김상옥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며 죽음의 세력을 향해 저항합니다. 부활을 믿은 그는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를 가슴에 두었죠.



영화 ‘밀정’과 동대문교회

김상옥은 조선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 군병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의 공생애처럼 ‘서른세 해’ 짧은 생을 살았죠. 교회공동체에서 믿고, 배우고, 가르치고, 벌고, 나누고, 결단했습니다. 당시 동대문교회는 수수한 벽돌예배당과 초가 부속건물, 기와 선교사 사택 등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가난과 의에 굶주린 이웃을 위한 그루터기교회였지요.


김상옥은 1919년 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사택에서 청년학도들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합니다. 이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죠. 중국 항일투쟁 때에는 궐석 사형선고도 받고요.

지금 동대문교회는 터만 남았습니다. 1892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병든 자를 위한 시약소로 시작했고 외국인 애국자 헐버트 선교사, 손정도 목사 등 참 신앙인들이 지켜낸 교회이자 병원었고 병원이자 학교였음에도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2013년 한양도성 공원화 사업과 맞물리며 교회가 매각한 거죠.

그러할진대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생가와 순교지도 지워지겠죠. 순교지는 일세(日貰)집이 됐고, 생가는 표석조차 없습니다. 한편 그가 일경의 추적을 피해 숨었던 왕십리 안정사는 최근 고층아파트 단지가 되어 흔적조차 없습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김상옥 동상, 종로3가 옛 종로경찰서 자리 의거 표석, 효제초교 내 김상옥체육관은 국가가 설치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동대문교회 옛 모습만 복원했어도 ‘천주교인 사도 바오로 안중근 의사’처럼 ‘정의의 하나님 편에 섰던 김상옥 의사’도 ‘다윗 김상옥’이 되지 않았을까요.

‘신분: 기독교인 김상옥’. 1923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글=종교기획부 전정희 부국장 jhjeon@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