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27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MLB) 월드시리즈 4차전. 보스턴 레드삭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전 전승으로 꺾고 우승했다. 86년간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보스턴을 구출한 사람은 다름 아닌 31살의 ‘애송이 단장’ 테오 엡스타인이었다. 그는 2007년 한 차례 더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2011년부터 시카고 컵스 단장 겸 사장으로 부임했다.
컵스는 밤비노의 저주만큼 역사가 깊은 ‘염소의 저주’를 가진 팀이다. 저주만을 푸는 마법사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엡스타인은 미국 뉴욕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엄친아’다. 어릴 때부터 장래의 꿈은 보스턴 구단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1991년 아이비리그 명문 예일대에 입학한 뒤 교내신문인 ‘예일 데일리뉴스’에서 스포츠 에디터로 활동했다. 이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홍보팀에 입사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샌디에이고대 로스쿨에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스스로 야구 경영자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닦았다.
당시 샌디에이고의 래리 루치노 사장을 만났고, 루치노 사장은 보스턴 사장이 되자마자 엡스타인을 단장으로 스카우트했다. 엡스타인이 29살 때의 일이다. 메이저리그 최연소 단장이 된 그는 야구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세이버매트릭스(Sabermetrics)에 의존하는 ‘머니볼’ 스타일로 구단을 운영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저비용·고효율 경영 전략을 가장 중요시했고, 팀에 도움만 된다면 스타선수들을 내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31살이던 2004년 그의 구단운영 철학은 결국 빛을 발휘했다. 커트 실링, 키스 폴크 등 우수한 투수들을 불러들였고, 10년간 간판 유격수였던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컵스로 팔아버리고 올랜도 카브레라, 더크 민트키비츠 등을 데려왔다. 그 해 보스턴은 와일드카드로 시작해 MLB 역대 100번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후 엡스타인은 머니볼에 선수와 투지를 중시하는 ‘전통적 야구'까지 두루 섭렵해 경영자로서 능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컵스 단장으로 부임한 뒤에도 운영 스타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망주를 하위리그에서 탄탄하게 키운 다음 이들이 만개하는 시점에 엄청난 돈을 투입하는 방식이다. 적재적소에 최고의 능력을 갖춘 자유계약선수(FA)를 영입해 내셔널리그 만년 하위팀이자 ‘동네북’ 취급을 받던 컵스를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컵스는 지난해부터 리빌딩의 결실을 맺으며 염소의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 ‘우승 청부사’ 엡스타인이 부임한 지 5년 만이다. 올해를 우승 적임기라고 판단한 그는 비시즌 동안 존 랙키와 제이슨 헤이워드, 벤 조브리스트등 FA를 대거 영입했다. 시즌 중반이던 지난 7월에는 트레이드 마감일을 앞두고 뉴욕 양키스에서 마무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을 데려오는 초강수를 뒀다. 컵스는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우승으로 2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했다.게다가 1935년 이후 81년 만에 100승 고지에 오르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컵스는 올해야말로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엡스타인의 본격적인 ‘저주 깨기’가 시작된 셈이다.
메이저리그는 단장의 능력이 팀을 좌지우지한다. 선수 영입이나 구성, 트레이드 등 구단 운영 전반을 도맡기 때문이다.
엡스타인은 지난 15일 미국스포츠전문매체 ESPN이 선정한 올해의 메이저리그 경영인에 뽑혔다. 컵스는 29일 그와 5년 재계약을 맺고 2021년까지 팀 운영을 맡기게 됐다.
■ML의 양대 저주
▲밤비노의 저주(Bambino's curse)= 미국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뒤 월드시리즈에서 86년간 우승하지 못한 저주. 밤비노는 루스의 애칭.
▲염소의 저주(curse of the Billy Goat)= 시카고 컵스가 1945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 염소를 데리고 온 관중 샘 지아니스를 저지한 뒤 우승하지 못한 저주. 지아니스는 "다시는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떠남.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108년 저주 vs ‘마법’ 이 사나이
입력 2016-09-30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