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간 밀실 거래, 경쟁자 헐뜯기, 이메일 해킹, 트위터 도용이 난무하는 유엔 사무총장 선거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고귀한 자리로 오르는 길에는 지뢰와 부비트랩이 잔뜩 깔려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제9대 사무총장 선출과정을 표현한 말이다. 비꼬는 말투지만 거짓은 없다. 다 최근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세속 교황’을 뽑는 일은 안타깝게도 지극히 세속적이다.
선거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지만 어느 후보가 반기문 총장의 후임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막판 변수가 돌출해 전선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초 12명이 입후보했다가 3명이 사퇴하고 9명이 남았다. 여기에 1명이 추가됐다. 지난달 28일 불가리아 정부가 자국 후보를 이리나 보코바(63·여) 유네스코 사무총장에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64·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교체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보코바는 후보 사퇴를 거부했다. 유엔 규정상 국가가 후보직을 철회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리아 출신 2명 모두 후보가 됐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서 없었던 것은 ‘동유럽 출신’과 ‘여성’이다. 따라서 차기 총장 선출의 키포인트도 동유럽과 여성이다. 후보자 10명의 출신지를 살펴봐도 현직과 직전 총장 출신지인 아시아(반기문)와 아프리카(코피 아난)가 없고 동유럽이 압도적으로(7명) 많다. 여성 후보도 절반(5명)을 차지한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15개 이사국이 최근까지 5차례 실시한 비공개 투표에선 여성도 동유럽 출신도 아닌 안토니우 구테헤스(67) 전 포르투갈 총리가 매번 1위에 올랐다. 지난달 26일 5차 투표에선 추천 12표, 반대 2표, 의견 없음 1표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구테헤스가 경쟁자를 따돌리고 독주하는 모양새지만 이면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반대 2표가 문제다. 5개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중에서 한 곳이라도 반대표를 던진다면 총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5개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의 찬성을 얻고, 상임이사국 모두의 동의를 얻은 후보 1명이 유엔총회에 상정돼 총장으로 선출된다. 여기서 핵심은 상임이사국 모두의 동의다. 결국 5개 강대국의 거래로 유엔 사무총장 선거가 판가름 나는 셈이다.
10년 전 선거 때 미국이 지지한 반기문 후보를 용인했던 러시아는 이번엔 반드시 동유럽 출신 총장을 세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서유럽 출신 구테헤스가 선두주자임에도 아직 당선 가능성이 불투명하다. 강대국에 자기 입맛에 맞는 총장은 매우 필요한 존재다. 시리아 내전처럼 서방과 러시아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 특히 그렇다.
새롭게 등장한 게오르기에바는 구테헤스를 위협하는 다크호스다. 일단 그는 동유럽과 여성이라는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불가리아가 먼저 내놓은 후보인 보코바도 동유럽 출신 여성이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 5차 투표에서 6위에 그쳤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가깝다는 점이 서방국의 반감을 샀다. 교체선수로 투입된 게오르기에바는 서방의 거부감이 보코바보다 덜하다는 게 강점이다. 세계은행 출신 경제학자로 유럽연합 집행위에 몸담은 이력이 서방 입장에선 긍정적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보이코 보리소프 불가리아 총리가 푸틴과 전화통화한 다음 날 게오르기에바 지명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암묵적 동의를 얻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뉴욕타임스는 “서방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은 게오르기에바와 구테헤스 중에서 선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가디언은 “게오르기에바가 선거전에 어떤 충격을 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며 신중론을 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게오르기에바를 적극 추천하는 것으로 알려져 프랑스와 영국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유엔에서 독일의 입김이 세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는 5일 실시되는 6차 투표에서 진짜 유력 후보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상임이사국 투표용지만 색깔을 달리하는 ‘색깔투표’가 처음 실시돼 각 후보에 대한 상임이사국의 비토(거부권) 여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보기]
☞
☞
☞
☞
☞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 10명… ‘동유럽 출신’ ‘여성’ 키포인트
입력 2016-10-01 00:02 수정 2016-10-01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