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드셨다. 물질의 세계가 있으면 영의 세계가 있고 말이 있으면 의미가 있으며 사건이 있으면 그 배후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처럼 보이는 세계 뒤에는 무궁무진한 보이지 않는 세계가 펼쳐 있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에 사람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에게는 보이는 사람 뒤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다윗상은 예술가의 머리에 담겨진 생각, 상상력, 심지어 그의 성격과 심리적 콤플렉스까지 담아내고 있다. 거대한 자연 속에 있는 작은 한 알의 씨앗에도 심겨진 이후 싹이 터서 햇볕과 비를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면서 자라나 열매로 맺혀진 과거의 세계와 앞으로 심겨져 이루어질 무궁무진한 미래의 세계가 함께 담겨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흉측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의 빛, 사랑과 희망이 존재하고 있다. 신앙인이라면 피 묻은 십자가 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한 우리 삶의 목표와 과제와 방법까지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중요한 사건들을 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고이고 쌓여 있다가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8세기에 들어 여섯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축적된 재정위기, 귀족들의 부의 독점과 나태한 생활, 국민들의 궁빈과 농촌의 황폐화 등이 융합되어 형성된 민중의 분노가 혁명으로 분출되어 나왔다. 그 뒤에는 왜곡된 가치관과 해이한 도덕의식, 더 뒤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의 빈곤이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그러한 역사의 보이는 현장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나? 우리는 동영상을 통하여 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군중을 모여들게 했을까. 무엇이 그 칠십 노인을 그 현장으로 내몰았으며, 경찰버스에 밧줄을 묶어 잡아당기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게 하였을까. 또 무엇이 그토록 살벌한 물대포를 퍼붓게 하였을까? 무엇이 경찰로 하여금 노인에게 그토록 집중하여 사격하게 하였을까? 그렇게 해야 했던 압력과 무게는 또 엄청났을 텐데 그것은 무엇일까?
보이는 사건 뒤에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구조가 있고 구조에는 방향이 있다. 정의롭고 사랑을 향한 구속의 방향과 증오와 독선으로 불의하고 악한 타락의 방향이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위하여 말씀하신다. 옳은 길로 가라고, 좁은 길로 가라고, 사랑의 길로 가라고. 그래서 백남기씨의 죽음은 하나의 메시지다. 우리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독점과 거짓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고, 대화하고 평화를 위해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큰 음성이다. 그 음성을 듣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며 응답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으며 무시하고 더 나아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말라기 선지자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여호와를 멸시하였나이까?”
유장춘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한동대 교수
[바이블시론-유장춘] 우리가 여호와를 멸시하였나이까
입력 2016-09-29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