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너 살 유아들이 어린이집에 와서 자신의 소지품을 넣는 서랍이 조금만 안 열려도 서랍을 두들기며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며칠 전 어린이집 교사인 교회 여 집사님은 이 같은 이야기를 하며 “이 아이들이 자란 미래가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게 문제 요인입니다. 문제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쌓였던 갈등이 결국 폭발하면서 표출된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기쁨의 대상을 나 자신이 아닌, 이웃에 둬야 합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기도와 헌금, 봉사시간이 아니라 성도 간 관계의 성숙성에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용하고, 강한 자가 마음대로 판을 치지만 이런 행동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기쁨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강한 자는 반드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약점을 비판하거나 왜 틀렸는지를 신학적으로 지적해 교회를 법정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또 약한 자를 고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확신에 대해 존중해주고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데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연합체로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기를 기쁘게 하면 안 될까요. 우리는 왜 연약한 자의 약점과 상처를 보호해야 할까요. 왜 믿음 좋은 신앙인들만 많은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절)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고 수고할 때 ‘왜 내가 이 고생을 하지’라고 따지지 마십시오. 나만 억울하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생하셨고 질고를 참으시며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니 ‘너 때문에 내 시간을 빼앗겼다’ ‘너 때문에 내 공간이 없어졌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주신 건강이나 지식 시간 재물 재능 직업 등을 가지고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축복의 통로로 활용해야 합니다. 이제 갈등과 문제의 대상을 뛰어넘어 이웃의 기쁨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이 부르실 그날까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기쁨이 되기 위해 계속 꿈을 꿔야합니다.
정균영 목사 (서울 예수우리교회)
◇약력=△한양대, 미 위스콘신 루터란대학원 졸업 △현 성경연구원 오리진커뮤니티 대표, ㈔국제독립교회연합회 교육분과 연구위원
[오늘의 설교]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
입력 2016-09-29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