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정의화] 김영란법, 진짜 민주주의 시작하는 계기

입력 2016-09-28 17:28

김영란법, 즉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1년 반 전 김영란법이 탄생할 때 국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이 법은 우리 사회를 맑고 투명한 선진사회로 다가서게 할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대한민국은 김영란법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그만큼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게 내 믿음이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 반만년 세월이 지났다. 그간의 민족사를 돌아보면 숱한 고난과 영광의 시기가 교차한다. 그러나 50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것은 왕과 귀족 등 극소수 지배층이 대다수 백성에게 군림한 전제적 질서였다. 성군(聖君)으로 불린 훌륭한 임금도 더러 있었지만, 왕은 지배하고 백성은 복종하는 구조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서구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던 근세 이후로도 우리 민족은 기존 질서에 순종하며 살았다.

우리의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 된 것은 광복 이후의 일이다. 왕정은 대한제국 몰락과 함께 끝났지만 그 후 더욱 강압적인 일제의 통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민주공화국이 선포되고서야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이어져 온 전제정의 전체 기간을 100년으로 치자면,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주창하는 민주주의 역사는 이제 겨우 돌을 지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뿌리가 깊어서일까. 우리의 봉건적 문화는 상상 이상으로 질기게 이어졌다. 권력층은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했고, 시민들이 오히려 ‘봉사’하는 위치에 머물렀다. 최근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고위관료, 법조계, 정치인 등의 비리 사건들이 그 증거다.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이 수세기 전 지배층이 했던 악습을 반복하고, 국민은 낡은 시대의 인식에 갇혀 그러한 기형적 질서에 무감각했던 탓이다.

이제는 다르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 김영란법은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을 불문하고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즉, 전도(顚倒)된 채 유지되던 주인과 머슴의 관계를 바로잡을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에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명기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 시행만으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앞에는 이 법의 정신을 잘 지키고 제대로 살려 나가야 할 더욱 무거운 과제가 남아 있다. 12년 전 우리는 ‘성매매방지법’을 통해 이미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성매매방지법 역시 사회적으로 큰 기대를 받으며 출발했으나 지금은 어떠한가. 김영란법이 같은 길을 걷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언론자유의 위축, 농어촌 경제에 미칠 영향 등 여러 걱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 정비의 필요성 때문에 역사의 진전을 막는 일은 곤란하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5년 부패인식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개 국가 중 27위를 기록했다. 부정청탁 방지제도 마련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시대적 명령이다.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한국정치 또한 달라져야 한다. 국가발전의 장애물인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변혁을 시작해야 한다. 헌법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고, 정당의 체질 역시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김영란법이 일으킬 새로운 바람이 낡은 이념과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한국정치를 정상 영역으로 밀어내는 시원한 순풍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