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란 <4> 합판회사 다니며 주경야독… 21세에 고교 졸업

입력 2016-09-28 20:53
김정란 권사는 첫사랑인 정용주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와 7년 연애 끝에 1984년 2월 결혼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설렘 가득했던 행복의 문은 닫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새로운 희망의 문을 스스로 열 수 있도록 나를 이끄셨다.

이웃집 언니의 도움으로 커다란 합판을 만드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솔직히 일은 고됐다. 객지에서 생활을 하려니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마저 빠듯했다. 어떤 날은 라면 하나로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다짐했다. ‘이 일도 못하면 앞으로 더 어려운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견뎌야 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결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각 한 번 한 적 없었다. 근무 중에 꾀를 부린 적도 없다. 근무 성적은 늘 일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리부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정란이 너를 지켜봤는데, 뭐든 성실하게 열심히 하더구나. 그래서 네게 더 좋은 직장을 소개해주고 싶다. 혹 원하는 곳이 있느냐?” 나는 서슴지 않고 답했다. “부장님, 전 좋은 직장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장님의 도움으로 회사 근처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 나이 19세 때 일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잠자는 시간이 줄어 몸은 피곤했지만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마냥 행복했다. 나는 더 큰 계획도 세웠다. ‘언젠가는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리라.’

남들보다 조금 늦은 21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잠시 한 도자기 회사 경리부에서 일했다. 그러다 서울 신길동에 예식장을 세운 고모가 일을 봐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예식장은 주로 주말에 바쁘니 주중에는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모네 예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식장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주중엔 예약을 받고 정산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주말이면 결혼식을 치르느라 정신없었다. 대학에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예식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해야 할지,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 무렵 남자친구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만난 사람으로, 당시엔 사촌 형의 출판 유통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성실함과 따뜻한 품성으로 내게 큰 믿음을 준 사람이었다.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의 결혼을 허락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생만 하는 막내딸이 좀 더 편안한 혼처를 찾기를 바라셨다. 홀시어머니에 시누이 셋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첫사랑인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설득해 1984년 2월 26일 우리는 결혼했다. 이후에도 나는 예식장 일을 계속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 경기도 부천에 작은 빌라 하나를 샀다. 하지만 신혼의 달달한 꿈도 잠시, 우리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어머니, 세 명의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 나는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