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창작춤의 대모’ 김매자(73). 그는 한국무용의 상징적인 존재이지만 영광과 시련을 넘나드는 영욕의 세월을 거쳐왔다. 1976년 제자들과 한국 최초 창작춤 동인단체 ‘창무회’를 창단, 수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를 배출했다. 하지만 1991년 입시부정에 연루돼 이화여대 교수를 그만둬야 했다. 그 사건이 그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긴 했지만 이후 현장으로 돌아가 무용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무용계를 이끌어온 창무회가 올해 40주년을 맞아 10월 4일∼12월 28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포스트극장에서 창작춤 40년을 기념한 ‘창무큰춤판’을 개최한다.
2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한 1세대들이 창무회를 이끌어 왔다면 앞으로는 2세대와 그 제자들이 끌어나가길 바란다”면서 “사실 내가 죽고 나면 창무회라는 이름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창무회의 정신은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단아한 의상과 정제된 동작만이 우리 춤의 전부로 여겨지던 1970년대, 맨발에 저고리를 벗어버린 모습과 파격적인 창무회 춤사위는 ‘지랄춤’이라 불릴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엔 논란이 됐지만 현재 한국 창작춤은 창무회의 혁명을 기반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무회의 창작춤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으로 세계에 처음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춤은 여전히 해외에서 초청을 받고 있다.
교단을 떠난 그는 1992년 창무예술원을 설립하고 국내외 무용소식과 평론 등을 담은 월간지 ‘몸’을 발행했다. 이듬해부터는 창무국제무용제를 개최해 왔다. 후원자들의 도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끌고 나가기엔 무리일 수 밖에 없었다. 극장과 축제를 운영하고 잡지를 발간하느라 재산도 다 처분해서 그는 이제 빈털터리 신세다.
그는 “무용이 상업적인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 빚이 쌓일 수 밖에 없다. 한동안 신용불량자로 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춤과 창무회를 아직은 포기할 수가 없다”면서 “지난해 6월 제1회 한성준 예술상 수상자로서 공연을 했는데, 그 1주일 전에 딸이 세상을 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무대에 올랐다. 춤을 추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냐? 오죽하면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춤에 미친 내게 ‘귀신이 붙었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춤에 대한 욕망과 열정은 여전히 뜨겁지만 창무회 40주년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무용인생을 정리할 생각이다. 그동안의 모든 자료를 추려서 내년쯤 전시회를 한 뒤 국립예술자료원에 넘기기로 했다. 자서전도 집필할 계획이다. 그는 “앞으로도 기회만 되면 작품을 만들고 춤도 출 거다. 동시에 창무회가 후대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작업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창무회 40주년 기념 ‘창무큰춤판’이 열리는 포스트극장은 그가 1985년 개관한 민간 첫 무용극장인 창무춤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번에 임학선 성균관대 석좌교수를 비롯해 임현선 대전대 교수, 한명옥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창무회 출신 안무가 20명이 릴레이 공연을 펼친다. 그도 12월 27일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강의와 공연을 곁들인 ‘춤본-하늘·땅·인간’을 선보일 예정이다.
글=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사진=구성찬 기자
김매자 “남은 게 빚뿐이라도… 춤 없이는 죽을 것 같아”
입력 2016-09-28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