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바스·브리스톨, 초록으로 세속의 때 씻고 마음을 물들인다

입력 2016-09-28 17:22
영국 남서부 온천도시 바스 중심부에 위치한 고대 로만 바스의 대욕탕을 찾은 관광객들이 원주 기둥 가운데 신비로운 초록빛 온천수를 바라보고 있다. 뒤에 고딕 양식의 바스 사원이 우뚝하다.
바스 시내에 자리한 초승달 모양의 로열 크레센트가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에이번 강 위 풀터니 브리지는 다리 위에 상점을 가진 세계 3대 다리 중 하나다.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된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리지'가 높이 80m의 절벽을 이어주며 아찔한 풍광을 풀어놓고 있다.
영국의 가을은 한산해진다. 6∼8월 성수기에 런던 중심의 주요 관광 명소를 가득 메웠던 관광객의 발길도 줄어든다. 호젓한 계절에 떠나는 영국 소도시 여행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더욱이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눈에 잡히는 드넓은 평원은 낭만을 안겨주며 마음을 가득 채워 준다. 런던에서 하루 또는 이틀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바스와 브리스톨이 이런 여행에 그만이다. 영국이 지난 6월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하면서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진 것도 여행의 부담을 덜어준다.



온천과 사교의 도시 ‘바스’

18세기 영국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설득’은 영국 유일의 온천도시 바스(Bath)를 무대로 하고 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160㎞가량 떨어진 이 도시에서 목욕과 관련된 명칭에 달라붙는 ‘바스’란 단어가 출발했다.

바스의 기원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기원전 863년 켈트족의 왕자 블래더드는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센병 환자란 이유로 돼지몰이꾼 신세로 살아야 했다. 어느 날 그가 기르던 돼지가 수증기 덮인 연못에 빠졌는데 끌어올려 보니 앓고 있던 피부병이 다 나아 있었다. 그는 온천수의 치유력을 자기 몸으로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병을 완치할 수 있었다. 왕좌를 차지한 그는 연못에 온천을 짓고 자기의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

바스의 역사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가 영국을 정복한 지 얼마 안 된 1세기 초 새로운 지배자들이 바스(당시 지명은 아쿠아에술리스)로 몰려들면서 욕탕들이 들어섰다. 서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로마 건축물로 꼽히는 원주 기둥으로 둘러싸인 로만 바스(Roman Bath)도 이때 생겼다. 고대 로마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거대한 목욕탕이다. 목욕탕이라고 해서 단순히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심신의 피로를 풀어내던 곳이다.

입구에서 대욕탕(The Great Bath)까지 미로처럼 이어진 길 좌우는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로만 바스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온갖 유물이 전시돼 있다. 치료의 여신 미네르바에게 바치는 신전에는 기둥, 정면 머리 장식을 했던 조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시공간이 펼쳐지는 구간만 1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전시실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로 대욕탕으로 갈 수 있지만 먼저 2층 테라스에 들른다. 아래로 신비로운 초록빛을 띤 온천수에서 연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웅장한 바스 사원과 광장, 주변의 건물들이 눈에 잡힌다.

로만 바스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이다. 온탕과 냉탕이 별도로 마련돼 있고 당시에 만든 물 빠지는 시설이 지금까지도 제대로 작동한다. 로만 바스의 2층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펌프 룸’에서는 온천물을 맛볼 수도 있고, 식사도 가능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전체를 둘러보는데 2∼3시간은 족히 걸린다.

로마인들이 물러난 뒤 바스는 오랫동안 잊혔다. 중세시대에는 싸구려 온천장 정도의 노릇밖에 못했다. 하지만 18세기초 앤 여왕이 신병 치료차 다녀간 뒤 달라졌다. 이 도시가 18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온천도시가 된 것은 세 사람 때문이다. 도시를 전반적으로 재설계한 존 우드 1세와 도시 건설에 필요한 석재를 내놓은 랠프 앨런, 그리고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유흥욕구를 만족시켜 준 리처드 보 내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가지에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이동을 한 것 같다. 18세기 조지안 스타일의 돌로 된 건축물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대표적인 것이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 이름 그대로 초승달 모양의 곡선 형태로 생긴 이 건물은 1767년 완공됐다. 30채의 집은 화려함을 추구하는 부유층들의 고급 맨션으로 사용됐다. 바스에 현존하는 18세기 유산 중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물로 손꼽힌다.

로열 크레센트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커스(Circus)는 3개의 크레센트가 모여 둥근 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각 크레센트는 33개의 집으로 이뤄졌으며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의 각기 다른 고전 건축 양식으로 꾸며졌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본 따 에이번 강에 건설된 풀터니 브리지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가들은 물론 ‘목욕’을 가장한 사교를 위해 귀족과 부유층들이 몰려들었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윌리엄 워즈워스 등 수많은 문학가들의 흔적도 오롯이 남아 있다.



부산 같은 느낌의 ‘브리스톨’

바스와 연계해 여행하기 좋은 도시는 우리나라 부산 같은 느낌이 드는 브리스톨이 꼽힌다. 영국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이 출발한 항구이고, 신대륙을 찾아 메이플라이어호가 출항한 곳이기도 하다. 바스를 둘러간 에이번 강이 이 도시를 관통해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2013년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다.

영국 10대들의 삶과 우정을 그린 성장 드라마 ‘스킨스’ 촬영지로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캐시의 의자 장면으로 유명한 브랜든 힐에 오르면 브리스톨이 자랑하는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리지’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크리스틀의 클리프턴과 노스 서머싯의 레이우즈를 연결하는 414m의 현수교다. 1831년에 착공돼 1864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에이번 강 위 80m 높이에 절벽과 절벽을 이어주고 있어 다리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유서 깊은 건물로는 1140년에 건축된 브리스톨 대성당이 꼽힌다. 영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게르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부채꼴 모양의 높다란 천장, 고딕양식의 창문 등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거리의 아트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뱅크시(Banksy)의 도시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뱅크시는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전시하는 등 상식을 깨는 행동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거리 곳곳에 그래피티 아트를 남기면서 시작된 도시의 그래피티는 이제 브리스톨의 상징이 됐다. 작품마다 어떤 풍자가 담겨 있는지, 무엇을 희화화했는지 생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행메모
부산發 첫 KTX 타고 인천공항 직행 후 영국항공 탑승… 런던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인천공항에서 런던까지의 비행 소요시간은 10∼11시간. 영국항공이 2012년 12월 2일 인천∼히드로 노선에 취항해 주 7회 운항하고 있다. 매일 오전 10시45분 출발해 오후 2시 전후에 도착한다. 항속거리가 긴 보잉787 기종이 투입됐다. 좌석은 비즈니스(35석), 플러스 프리미엄 이코노미(25석), 이코노미(154석) 3종류다.

코레일은 지난 7월 영국항공과 양해각서 (MOU)를 맺었다. 이로써 부산 지역 여행객은 고속철도를 이용, 인천공항으로 바로 간 뒤 영국항공을 탑승해 런던 및 유럽 지역을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됐다.

부산에서 오전 5시 출발하는 첫 KTX를 타면 인천공항에 8시42분쯤 도착해 영국항공을 이용할 수 있다.

런던에서 에이번주 브리스톨 남동부에 있는 바스까지는 기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가격이 비싸다. 기차를 타기 위해 히드로공항에서 패딩턴역까지 공항철도를 이용한다. 20분가량 걸린다. 바스에서 브리스톨까지는 기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로만 바스 바로 옆에 최근 오픈한 현대식 '서메이 바스 스파'에서는 온천뿐 아니라 마사지, 아로마테라피 등의 다양한 서비스가 기다린다. 바스 시내는 특별한 교통편 없이 도보로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있다.

바스·브리스톨(영국)=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