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나미] 우리는 왜 일할까

입력 2016-09-27 18:41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각자의 일터로 신나게 가고 싶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못 먹고 헐벗을 때에는 일단 생존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아예 의심할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노동 자체에 대해 다양한 태도를 관찰하게 된다. 아침과 도시락 준비는 세상없어도 꼭 했던 과거 어머니들과 달리, 요즘 많은 전업주부들도 아침은 각자 챙기거나 걸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높은 실업률 때문이기도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공무원 등 시험공부나 하겠다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일자리를 잃은 중장년 중에는 몸을 쓰는 일보다 앉아서 돈 버는 주식이나 경매 투자에 올인하는 이들도 많다. 요즘에는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가만히 앉아서 돈 벌 수 있는 ‘임대사업자’가 꿈이라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하지만 실제 임대사업자들에게 들어보면 끊임없는 임차인과의 분쟁, 수선 작업과 비용, 세금 부담, 공실이 되었을 때의 손실, 대출이자 비용 등등 골치가 아프다고 말한다. 집 하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자의 고민으로 들리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노동을 씩씩하게 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젊은이들 중에는 가리지 않고 서너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거나 사업자금을 모으는 이들도 있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사와 육아를 씩씩하게 해내는 젊은 부부들, 또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편모·편부들, 부모 없는 손자 손녀를 맡아 키우면서 돈까지 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다. 지겹도록 금수저 흙수저 타령이 나오지만 부모 형제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자수성가형 젊은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강도 높은 노동을 해내고, 어떤 이들은 모든 조건이 갖춰졌는데도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할까. 물론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모순이 같이(혹은 먼저)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정치적 역량 없는 평범한 심리학자로서 어떤 열악한 조건에서도 노동하는 인간의 특징을 열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우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즉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 않고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어여쁘고 귀한 내 자식이 배가 고프다 한다면 피곤하고 힘들어도 뭐 하나라도 먹이고 싶은 게 정상적인 부모 마음이다. 반대로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부모나 형제가 있다면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라도 열심히 일해 성공하려 하게 된다.

다음, 자신의 일에서 장기적인 의미와 보람과 미래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견디는 힘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야의 장인이 되기 위해 몇 년 동안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참아낸다. 직장에서의 동료애도 중요한 조건이다. 아무리 힘든 노동이라도 회사나 조직에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보람을 함께 느끼고 회사가 성장하면 나도 성장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나사 하나를 박는 일이라도 유쾌하게 해나간다.

노동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혜능조사, 성 프란치스코 같은 성인들뿐 아니라 마더 데레사, 마하트마 간디 같은 현대의 영성 지도자들이 존경받는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검박함과 근면성 때문에 추앙받는 게 아닐까. 중세의 영적 지도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일상에서 예수님을 섬긴 마르타의 영성을 강조했고, 성녀 소화 데레사는 몸소 일상과 영성을 연결하기도 했다. 노동의 성스러움을 강조한 개신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모든 이들 옆에는 항상 소리 없이 안아주고 응원하는 하나님이 계실 것 같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