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란 <3> “학비 벌어 진학” 열일곱에 섬마을 떠나 취업

입력 2016-09-27 18:38 수정 2016-09-27 21:06
김정란 권사(가운데)가 중국 단둥 압록강변에서 어머니, 딸을 보듬어 안고 있다. 어머니는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몸소 실천한 분이라고 김 권사는 회상한다.

인생에 밑그림을 그린다는 건 곧 삶의 계획이나 꿈, 목적을 세운다는 의미다. 밑그림을 그린 사람과 그리지 않은 사람은 당장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살면서 뜻하지 않게 고난이나 역경을 만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꿈과 목적이 있는 사람은 잠시 당황할 수는 있지만 결코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 막연하게나마 이런 밑그림을 그렸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자가 돼 엄마를 편히 모시자.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자.’ 이 꿈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더욱 구체화 됐다. 잠시 학업을 중단했을 때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 됐다.

군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형편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사후도로 돌아가 김 양식을 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지냈다. 김은 차가운 바닷물에서 자란다. 때문에 김 양식은 한겨울 차가운 바닷바람을 헤치고 바다로 나가 파도와 싸우며 작업한다. 어머니를 도와 김 양식 일을 하면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하든 고등학교에 다녀야 한다.’ 학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김 양식에 필요한 말뚝을 팔던 여수 사람 양 사장이 어머니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왔다. 우리 사정을 잘 알던 그는 내가 자신의 집에 와서 초등학생, 유치원생 두 아이를 돌보는 가정교사 일을 해주면 나를 고등학교에 보내 준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딸을 남의 집에 맡기는 것도 그렇고, 신세지는 일을 할 수 없다며 반대하셨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나의 간절함에 결국 어머니는 허락하셨다.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됐구나’라며 벅찬 가슴을 안고 양 사장네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처음 두어 달은 잘 지냈다. 그런데 양 사장 부인이 집안일을 외면한 채 외출이 잦다보니 나는 그 집 살림까지 도맡게 됐다. 양 사장은 학교를 보내주겠다던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학교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미련을 갖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여수에서 버스를 타고 선착장까지 가서 완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내가 처한 막막한 현실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다시 사후도로 돌아간 나는 어머니 일을 도우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옆집 언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며 소식을 전해 왔다. ‘정란아, 여기 회사에 일손이 부족해 사람을 구하고 있다. 네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을 잘 알지만 우선 여기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어 보는 건 어떨까?’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편지를 잘 접어 가방에 챙겨놓고 언니를 만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한 번 탈 수 있는 단돈 100원을 들고서 말이다. 그렇게 열일곱 살 내 인생에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렸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