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 골프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널드 파머(87·미국)라는 이름은 안다. 그만큼 파머는 골프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골프의 ‘전설’ 파머가 26일(한국시간) 세상을 떠났다. BBC 등 주요 외신은 파머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한 병원에서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는 심장 검진을 받기 위해 지난 22일부터 병원에 입원했다.
1955년 프로에 데뷔한 파머는 캐나다 오픈을 시작으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통산 62승을 거둔 골프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PGA 투어 62승은 샘 스니드(미국·82승), 타이거 우즈(미국·79승), 잭 니클라우스(미국·73승), 벤 호건(미국·64승)에 이어 PGA 역사상 5번째로 가장 많은 우승 기록이다.
메이저대회는 1958년 마스터스를 비롯해 7승이다. 그는 1958년부터 1964년까지 7년 사이에 메이저 대회 우승을 모두 휩쓸었다. 마스터스에선 4차례, 브리티시오픈에선 2차례, US오픈에서 1차례 우승을 달성했다. 다만 PGA 챔피언십 우승과는 인연이 없어 그랜드슬램 달성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파머는 골프를 야구 축구 농구처럼 대중이 열광하는 인기 스포츠로 만든 스타였다. 그가 활약하기 시작했던 1950년대는 막 컬러TV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다. 그때 파머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쇼맨십, 유머, 카리스마로 전 세계 골프팬들을 매료시켰다. 경기장에선 항상 수천명의 갤러리가 그를 따라다니며 환호했다. 그 갤러리들을 ‘아니 군단(Arnie’s Army)’으로 불렀다. 골프위크는 “당시 파머의 인기는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와 맞먹었다”고 했다.
그는 의류 사업도 시작했고, 전 세계에 300개 이상의 골프코스를 설계했다. 플로리다에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아널드 파머 메디컬 센터’를 설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PGA 투어 대회도 개최해 왔다.
파머는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부터 2004년까지 50년 동안 마스터스에 한 번도 빠짐없이 출전했고,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마스터스의 시작을 알리는 시타를 했다. 주요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에게는 편지로 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지난 19일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역대 남녀 메이저대회 최소타 기록을 세운 전인지에게 보낸 것이었다. 파머는 골프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운동선수로는 여섯 번째로 미국 의회 금메달을 수상했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 의회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그랬기에 그의 애칭은 ‘더 킹(the King)’이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골프계의 가장 위대한 앰배서더(대사) 파머의 별세 소식에 깊은 슬픔의 뜻을 표한다”고 애도했다.
후배들도 그를 추모하고 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니클라우스는 트위터에 “위대한 친구를 잃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우즈는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 당시 파머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파머의 우정과 위로, 유머에 감사드린다. 파머가 없는 골프는 상상할 수 없다”고 썼다. 그렉 노먼은 “파머는 카리스마와 인격으로 골프를 변화시켰다. 나를 포함한 선수 모두는 파머가 골프에 가져다 준 선물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하늘로 홀인원 하러 간 ‘골프 대사’
입력 2016-09-2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