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년 전남 완도의 아름다운 섬 사후도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호적상에 난 ‘1956년생’이다. 1, 2년도 아니고 무려 4년이나 빨리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군대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어머니의 삶은 너무도 팍팍했다. 당시엔 출생 신고를 하려면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정도로 생계가 버거웠던 어머니는 미처 출생 신고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둘째 오빠가 취직한 덕분에 나는 군산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출생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급하게 수기로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출생 연도를 오기(誤記)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 일은 가슴 아프다. 숫자를 잘못 기록해서가 아니라, 당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됐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섬에서의 삶은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가 김 양식을 해 육지로 내다 팔아도 여섯 식구가 입에 풀칠만 겨우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몸소 보여주신 어머니 덕분에 우리 다섯 남매는 구김살 없이 반듯하게 자랐다.
나는 초등학교 때 제법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섬마을 분교라 전교생이 50명 정도였지만 섬 축제나 운동회 같은 행사에 학생 대표로 나가 웅변을 할 정도로 성격도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주목 받는 학생이어도 작은 섬마을에서, 그것도 여자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사후도에는 당시 중학교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는 중학교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만 공부를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오빠가 군산의 한 회사에 취직하면서 “정란이는 내가 중학교까지 가르치겠다”며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군산으로 데리고 갔다. 구암초등학교로 전학한 나는 오빠 집에서 학교까지 2시간 남짓 걸어 다녔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신앙생활도 이때쯤 본격 시작했다. 사실 교회에 처음 간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사후도에서 주말이면 배를 타고 완도 인근 교인동의 교회에 친구를 따라 다녔다. 교회에 대한 첫 느낌은 ‘아름답다. 또 오고 싶다’는 거였다. 언덕 위에 자리한 교회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군산에선 나보다 한 살 어린 앞집 친구를 따라 성원교회에 나갔다.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데도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던 목사님,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시던 사모님을 잊을 수 없다. 신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유치부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맡았는데, 매주일 아이들을 데리러 집집마다 찾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배 시간엔 아이들에게 공과책을 읽어주고, 예배를 마치면 또 일일이 아이들을 데려다주면서 나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정란 <2> 어머니 홀로 다섯 남매 키운 가난했던 섬 생활
입력 2016-09-26 17:46 수정 2016-09-2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