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세워둔 자전거는 골격만 남긴 채 잿더미가 돼 있었다. 벽은 온통 시커멨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자리는 처참했다.
모두 잠에 빠져든 24일 오전 4시35분쯤 서울 도봉구 쌍문동 15층짜리 A아파트 13층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웃 동(棟) 주민의 신고를 받고 소방차와 소방관이 긴급 출동했다. 소방차들은 쉽사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현관 앞에 이중으로 주차된 차량 때문에 불을 끄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화재로 집주인 이모(46)씨 등 3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진압에 시간이 오래 걸린 데다 새벽시간대라 자칫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곤하게 잠든 이웃을 깨워 대피를 도운 ‘평범한 의인(義人)들’이 있었다.
불이 난 집 바로 아랫집에 살던 김경태(55)씨는 당시 매캐한 냄새에 잠에서 깼다고 한다. 윗집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올라가보니 자욱한 연기 사이로 윗집의 큰아들 이모(21)씨가 소방호스를 끌어다 불을 끄고 있었다. 불은 번질 대로 번져 현관문 앞까지 환한 빛이 새나왔다. 김씨는 서둘러 아내와 딸들을 1층으로 내려보냈다. 그러고선 12층부터 1층까지 걸어 내려오며 모든 현관문을 발로 차고, 손으로 두드렸다. 초인종을 누르며 “불이야”라고 외쳤다. 도봉구청 관계자는 “김씨 덕분에 대피가 빨라져 대형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을 했지만 그는 자신을 낮췄다. “같은 곳에 사는 주민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한 것도 없는데…”라며 “주민들이 불이 난 걸 몰랐던 데다가 화재경보도 울리지 않아 문을 두드려가면서 내려온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갈 곳이 없어 의정부 쪽에 모텔 방을 겨우 하나 얻었다. 잠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못 찾고 있다”고 했다.
잠든 이웃들을 깨운 주민은 김씨만이 아니었다. 1층에 산다는 한 주민은 “8층에 사는 50대 주부도 현관문을 두드리며 1층까지 내려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뒤따라온 주민들도 나처럼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내려왔다”고 기억했다.
김씨의 행동은 지난 9일 자신이 살던 서울 서교동의 원룸 건물에서 불이 나자 이웃의 대피를 도왔던 ‘초인종 의인’ 고(故) 안치범(28)씨를 떠올리게 한다. 김씨와 안씨처럼 ‘선한 이웃’은 우리 주변에 아직 많다. 지난 22일 중부내륙고속도로 남대구IC에서 한 차량이 하이패스 요금소를 들이받아 구조물이 무너지고, 안에 있던 여직원이 깔리는 사고가 났다. 사고를 목격한 화물차 기사와 견인차 기사는 현장에서 119에 신고한 뒤 견인장비로 무너진 요금소 지붕을 들어올려 여직원을 구해냈다. 지난 13일 새벽에는 KTX 김천(구미)역 인근에서 선로작업자 2명이 숨졌는데, 이들은 대형 열차 사고를 막기 위해 철로에 있던 손수레 차(트롤리)를 밖으로 밀어내다 변을 당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글=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삽화=이은지 기자
[기획] 이웃 위해 ‘내몸’ 던지는 義人들
입력 2016-09-26 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