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승, 황석영 등단작 ‘입석부근’ 영화화… 풍경 위 흐르는 문장 읽으며 인물·스토리 상상

입력 2016-09-26 17:38 수정 2016-09-27 19:44
원로 소설가 황석영의 동명소설을 영상으로 만든 장민승 작가의 작품 ‘입석부근’의 한 장면. 등단작이 수록된 ‘사상계’ 원본 문장 중 작가가 골라낸 빛나는 문장을 그대로 살려서 화면 위로 흐르게 하는 기법을 썼다. 플랫폼-엘 제공
빙벽을 품은 채 짐승처럼 웅크린 설산 위로 또 눈이 내리는데…. ‘검은 고요’를 깨는 듯한 첼로의 충격적 음향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입석부근(立石付近)’. 제목 글씨체는 소설이 실렸던 1962년 ‘사상계’의 활자체 그대로다. 이어 문장들이 카메라가 미장센으로 잡아낸 겨울산 위로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세로글쓰기다. 간혹 쪽수도 표시돼 있다.

“지금은 내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시간이다”

“괜찮아?”

‘미술계의 기린아’ 장민승(37·사진) 작가가 50년도 더 전에 발표됐던 소설가 황석영의 1962년 등단작 ‘입석부근’을 영상화했다. ‘사상계’에 실렸던 원본 중 장 작가가 지우지 않아 ‘살아남은’ 문장들의 효과가 탁월하다.

흔히 소설의 영화화는 무대가 되는 장소와 함께 등장인물이 있다. 이 작품에선 장소만 있다. 하지만 관객은 흐르는 문장을 읽으며 인물과 스토리를 더 풍부하게 상상하게 된다. 작품의 무대인 설악산 토왕성 폭포의 빙벽을 등반하는 청춘들의 사투, 고독과 우정, 삶과 죽음이 떠오른다.

풍경 위를 흘러가는 문장은 마치 눈발 같기도 하고, 서서히 얼어붙은 폭포의 물줄기 같기도 하다. 흐르는 속도는 아주 더디어서 기암이 형성되기까지 억겁의 시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분방한 상상이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음악이다.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불안하게 연주되는 오케스트라가 몰입도를 높인다. 사진 작업을 통해 훈련된 장 작가의 시각적 해석, 정재일 음악감독의 청각적 번역의 협업은 상영 장소인 플랫폼-엘의 음향시설을 통해 빛난다. 예술영화는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다. 상영 장소인 플랫폼-엘에서 작가를 지난 20일 만났다.

미술계의 ‘킬러 작가’ 배출 통로인 에르메스상을 2014년 수상한 장 작가는 당시 수상작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애도의 조사(弔辭)를 문자가 아니라 소녀의 수화를 통해 시적으로 번역하는 영상작품을 선보였다.

장 작가는 ‘꽃잎’으로 잘 알려진 장선우 감독의 아들이다. 영화작업에도 참여했지만 주로 음악 PD를 했고 카메라를 직접 잡은 것은 처음이다. 이번 작품을 위해 전문 산악인으로부터 산악훈련도 받았다. 토왕성 폭포는 우리나라 근대 산악문화를 꽃피운 등반 훈련장으로, 지금도 허가가 있어야 오를 수 있는 험한 곳이다.

처음엔 산을 찍기 위해 그곳에 갔던 그가 소설 ‘입석부근’을 만난 전 중간쯤 촬영했을 때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녹슨 하켄(못), 풍화된 자일(밧줄) 등을 보며 아버지 세대들의 도전 정신을 생각했어요. 나약해진 우리 세대를 돌아보며 웃세대에 헌사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플랫폼-엘은 ‘루이까또즈’ 핸드백으로 잘 알려진 태진인터내셔널이 지난 5월 서울 강남구 관세청 사거리 인근에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번 작품은 프랫폼-엘의 지원으로 제작됐다. 10월 9일까지(02-6929-4462).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