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린 물방울 작업, 미술관 생겼으니 보상받은 것”

입력 2016-09-25 17:48
대지면적 4990㎡, 연면적 1587㎡를 갖춘 김창열미술관 외관. 2013년 5월 제주도와 김창열 작가가 작품 기증 협약을 체결한 지 3년 4개월 만에 개관했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전시실에서 24일 기증작 앞에 선 김창열 화백. 이 작품은 각 길이 3m짜리 캔버스 3점으로 구성된 연작으로 기증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평생 물방울만 왜 그렸나구요? 달마대사가 10년간 면벽수행했는데, 이건 굉장히 못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생각하며, 저도 이것(물방울 작업)만 했습니다. 그가 10년 만에 득도했고요. 저도 미술관 하나 지어 받았으니 달마대사 못지않은 보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개관식에 참석한 김창열(87) 화백의 목소리는 느리지만 또박또박했다.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제주 한림읍 저지리예술인마을에 자리잡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초대 관장 김선희)이 지난 24일 개관했다. 화산을 품은 현무암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단층 건물(1587㎡)이 주변의 풍광 속에 녹아든다.

생존 작가를 기념하는 공공미술관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김창열’은 예술적으로도, 대중적으로 성취를 이룬 이름이다.

작가는 평안도 맹산군 출신인데, 제주와 무슨 연고가 있을까.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서예를, 광성고보 시절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우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징용을 피해 월남해 경찰학교에 자원했다. 이런 가운데 1952년부터 1년 6개월간 제주에서 피난생활을 했고 제주의 풍광과 인정에 반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살았어요. 어떤 종착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도에서 받아준 것이지요.”

김 화백은 초기에는 박서보, 정창섭 등과 앵포르멜 추상화 운동을 했으나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다루며 ‘물방울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물방울’이 탄생한 곳은 나라밖 프랑스다. 그는 뉴욕에서 수년간 머물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소개로 69년부터 파리에 정착했다. 72년 온통 검은 화면에 커다란 물방울 두 개가 있는‘밤의 이벤트’이란 작품을 파리의 화랑에 출품했다. 유럽 화단에 본격 데뷔한 이 작품에는 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물방울이 첫 흔적을 드러낸 것이다.

“물방울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럼에도 왜 집착해서 그리느냐고 물으면 그건 제가 못났기 때문이지요.”

동그스럼한 얼굴에 백발의 수염조차 둥근 형태로 잘라 더 사람 좋아 보이는 노화백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물방울에 대한 미학적 논의는 미술계에서 활발하다. “손주의 오줌방울 같다”며 그가 농처럼 던진 물방울에는 전쟁과 가난의 시기를 보낸 한국인들의 상흔이 응결되어 흘러나온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김 화백은 미술관에 대표작 220점을 기증했다. ‘물방울’ 시리즈의 원조가 되는 60년대 말의 ‘현상’ 시리즈에서부터 80∼90년대의 ‘회귀’ 연작을 중심으로 한 대형작품, 한자 및 천자문과 함께 물방울이 있는 작품 등 물방울의 탄생과 변주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3점짜리 대형 연작도 쾌척했다. 파리 시절 조수로 일했던 유진상 계원대 교수는 “가족들이 기겁할 정도로, 중요한 작품 위주로 직접 세 차례에 걸쳐 고르셨다”고 했다. 김 화백과의 사이에 2남을 둔 마르틴 여사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아들을 장가보내는 느낌, 내 살갗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라며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애잔한 눈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파리에서의 첫 해, 김 화백은 마구간에 기거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그 때 평생의 반려자가 된 마르틴을 만났던 것이다.

기증 작품들을 보여주는 개관전은 ‘존재의 흔적들’이라는 제목으로 내년 1월 22일까지 열린다.

제주=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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