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동물원과 미르재단

입력 2016-09-25 18:37

지난 4월부터 업계를 담당한 뒤 기업 홍보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민원 중 하나가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상생을 도모한다는 창조경제혁신센터 사업 관련 보도 요청이었다. 1주년 성과를 비롯, 센터 관련 소소한 진행사항만 있어도 이메일뿐만 아니라 확인전화까지 어김없이 왔다. 하루는 모 그룹 실무진과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보도자료에 나온 의의나 성과를 줄줄이 나열했다.

“형식적 얘기 말고 진짜 이 사업이 투자가치가 있습니까.”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년 12월(대선) 이후면 문 닫을 텐데요. 이 정부 임기 동안에는 열심히 해야죠.”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대기업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센터의 미래에 대해 동일한 평가를 내렸다.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 자원외교처럼 한시적인 관치정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센터를 운영하는 모 그룹 고위 인사는 “정부는 17개 시도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립한 뒤 17개 그룹을 매칭시켜놓고 알아서 벤처기업 육성에 나서라고만 한다”며 혀를 찼다.

이달 초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동물원’에 비유하며 신랄히 비판해 논란이 됐다. “올 것이 왔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혹시 이런 시각이 대기업 시각에 너무 치우친 것 아닌가 싶어 센터의 수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벤처기업 CEO 4명의 의견도 들어봤다. 이 중 3명이 관치사업의 한계를 거론하며 동물원이란 지적이나 대기업 독점 구조라는 문제점에 동의했다.

최근 핫이슈로 떠오른 미르·K스포츠 재단 사태의 뿌리도 창조경제다. 이들 재단은 한류 문화와 스포츠 등 창조경제 콘텐츠 확산을 위해 세워졌다. 창조경제 흡인력은 대단했다. 국내 굴지의 재벌들이 너나없이 나서서 800억원 가까운 돈을 두 재단에 출연했다. 정부는 신청서를 받은 지 5시간 만에 미르재단 설립을 허가해줬다. 실무작업을 진두지휘했다는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시대 흐름에 맞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설립을 주도했다”고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벌써부터 정치권에서는 ‘창조경제 게이트’ ‘제2의 일해재단’ 주장이 나온다.

게이트인지 아니면 과도한 의혹 부풀리기인지는 국정감사 등을 통해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짚어봐야 할 것은 정권과 기업 간 건전치 못한 공생관계다. 정부가 떡고물 등 각종 이권사업을 통해 기업 참여를 강요하는 시대는 아니라지만 여전히 정권이 전시성 정책을 띄우고 기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달려드는 패턴은 변치 않고 있다. 기업이 어느 사업에 적극 뛰어드는 것은 미래 성장동력 등 확실한 이윤이 생길 것으로 여길 때와 보험용으로 준비할 때다. 혁신센터와 미르재단에 대한 재벌의 참여가 전자 때문으로 생각하는 기업인은 몇이나 될까.

혁신센터와 미르·K스포츠 재단이 설립된 지난해와 올해 우리 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10%에 육박하고 수출은 사상 최대인 19개월 연속 감소했다. 전경련 조사 결과 대기업 2곳 중 1곳은 지난해보다 올해 채용 규모를 줄이겠다고 했다. 영업실적, 고용 모두 저조한 상황에서 효과가 의문시되는 정부 주도 사업에 돈을 들이는 기업의 행태는 정상적이지 않다. 관치사업이 주는 유혹이나 그것을 거부하는데서 오는 불안 모두 기업은 떨쳐내야 한다. 30여년 전 군사정권 시절 일해재단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유사한 의혹을 받는 것 자체가 치욕 아닌가.

고세욱 산업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