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는 신데렐라가 있고, 우리에게는 콩쥐팥쥐가 있다. 베트남에는 띰과 깜, 일본에는 강복미복, 중국에는 섭한 아가씨가 있다.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여성이라도, 온갖 부당함을 참고 견디면서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권선징악의 내용일까.
콩쥐팥쥐 이야기에는 여러 판본이 있다고 한다. 콩쥐가 계모와 팥쥐에게 학대를 당하는 앞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결말 부분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착한 콩쥐가 마침내 귀한 신분이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나는 ‘권선’의 이야기. 그리고 팥쥐의 계략에 빠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역시 귀한 신분이 되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복수를 하는 ‘징악’의 이야기다.
콩쥐는 어떻게 복수를 할까? 팥쥐를 끓는 물에 삶아서 젓갈을 담근 뒤 계모에게 그걸 먹인다. 계모는 자기 딸의 살인지도 모르고 그걸 맛있게 다 먹은 뒤 마지막에 남은 뼈를 보고 자기가 먹은 젓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베트남이나 중국, 일본의 콩쥐팥쥐 이야기도 비슷한 결말이 나오는 다른 판본이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대로 오면서 잔인한 ‘복수’ 부분이 사라진 것은 성숙과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가 사라진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단다.
피해자-가해자의 구도에는 가해자의 명백한 사악함에 맞물려 피해자의 심리적 나약함이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기만이나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실이 아닌 것도 같지만 달콤하니까 믿고 싶은 마음, 부당함이나 가혹함에 대항하고 싶지만 참는 게 더 쉬운 것 같고, 착하게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든가, 언젠가는 나를 좋아해줄 거라는, 현실을 호도하고 싶은 순진함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끓는 물에 삶아 젓갈을 담가 먹어야 하는 것은, 팥쥐가 아니라, 그런 미성숙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글=부희령(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콩쥐팥쥐 이야기
입력 2016-09-22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