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산문 읽기, 즐거움의 햇볕 쬐기

입력 2016-09-22 18:37

가끔은 에세이를 슬슬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산문집을 빼서 목차를 둘러보다 맘에 드는 글을 골라 초콜릿 한 쪽을 먹듯 그렇게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읽기에 대해서 “즐거움의 햇볕을 쬐는 느낌이 든다”고 표현한 바 있다.

‘천천히, 스미는’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써진 영미 작가들의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다. 번역자 강경이씨가 세계의 아름다운 산문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자는 생각으로 글들을 채집해 번역했다. 주제와 스타일이 제각각인 작가 25명의 산문 32편이 수록됐다. 여기 실린 글들은 3분의 2 이상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강씨가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라고 꼽은 제임스 에이지의 ‘녹스빌: 1915년 여름’을 보자.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작가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유년의 여름날 저녁을 회상한 글이다.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모두 이 지상에. 이 지상에 있는 슬픔을, 여름 저녁 밤의 소리에 둘러싸여 퀼트 위에 누워 있는 슬픔을 누가 말할까?”

조지 오웰이 프랑스령 모로코의 도시 마라케시에서 1939년 겨울을 보내며 쓴 ‘마라케시’는 특유의 사회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런 도시를-주민 20만명 중 적어도 2만명은 말 그대로 그들이 걸친 누더기 말고는 가진 게 없는-걸어 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더군다나 얼마나 쉽게 죽는지 보면 내가 진짜 사람 사이를 걷고 있다는 게 믿기 힘들어진다. 현실의 모든 식민제국은 바로 이런 사실을 토대로 서 있다.”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지만 한 편 한 편 다 반짝거린다. 봄날의책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일본어, 중국어 등의 산문선집을 펴낸다는 계획이다.

김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