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승주] 달빛과 음악을 만나러 가다

입력 2016-09-21 18:56

# 어둠이 내리니 감각은 더 예민해졌다. 둥근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낮에는 몰랐던 새소리가 들렸다. 추석연휴에 ‘창덕궁 달빛기행’을 다녀왔다. 달빛과 작은 청사초롱에 의지해 궁궐로 들어섰다. 이어폰 속 해설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친절했다. 그곳에선 ‘빨리 빨리’라는 재촉이 없었다. 대신 ‘천천히, 조심조심’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들렸다. 오랜만이었다. 어떤 순간을 음미하고 되새길 여유 없이 휙 머릿속에 스쳐갈 뿐이었는데, 궁궐에선 달랐다. 오랫동안 달빛을 감상했다. 창덕궁 후원, 연못에 비친 물그림자는 숨이 멎도록 아름다웠다.

# 마룻바닥에 앉았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차려입을 필요는 없었다. 바닥에 앉아야 하니 바지에 운동화가 제일 편하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 연주자도 관객과 같은 공간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있었던 ‘하우스콘서트’가 그랬다. 2002년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시작된 하우스콘서트는 말 그대로 집에서 열리는 소박한 공연이다. 관객은 적으면 30명 많으면 100여명. 이 역시 거창하지 않아 좋았다. 남들 시선 의식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빠지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창덕궁은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달빛기행은 불이 꺼졌던 창덕궁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궁궐의 밤은 낮과는 완전히 달라, 안 보이던 문창살이 눈에 띄고, 바닥에 깔린 돌의 질감이 느껴진다. 하우스콘서트에 가면 마룻바닥을 타고 울리는 음의 진동이 전해진다. 연주자의 작은 숨소리와 표정까지 생생하다.

두 문화체험 모두 가보면 반하게 된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달빛기행은 ‘밤에는 왜 궁궐을 닫을까, 그때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걷기 좋은 봄가을, 달빛이 환한 음력 보름 즈음에 궁궐을 돌아보는 달빛기행은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많은 이들을 만족시켰다.

하우스콘서트도 마찬가지다. 비싼 티켓 가격과 격식을 갖춘 공연장이 부담스러운 관객. 그리고 실력은 있으나 유명하지 않아 설 무대가 없는 연주자. 이들을 위해 작은 공간을 마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이게 과연 될까 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입장료는 2만원(청소년 1만원). 관객이 몇 명이든 입장료의 절반을 연주자에게 준다. 하우스콘서트가 이날 500회를 맞았다.

성공한 이벤트에는 창의적인 발상과 이를 밀고 가는 뚝심이 있다. 성공한 인생도 어쩌면 비슷할 것이다. 세상의 기준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인생이면 된다. 지금 당장 내가 좋아할 만한 이벤트,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봤다. 그중에는 은퇴 후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것처럼 거창한 것도 있지만, 창덕궁 달빛기행이나 하우스콘서트 관람처럼 비교적 쉬운 것도 있었다. 리스트를 만들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나가니 성취감이 생기고 행복해졌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다. 엄청 큰 행운이 한 번 오는 것보다 소소한 즐거움을 여러 번 느끼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사실 엄청난 행운은 잘 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올가을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만들어보자. 마침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한 계절이 왔다. 평소에 꼭 하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일, 나만의 모험을 시작하기 좋은 때다.

한승주 문화팀장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