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경영 비리의 정점에 서 있는 신동빈(61) 회장이 차에서 내려 검찰청사 앞 포토라인에 서는 데는 25걸음이면 충분했다. 이 걸음을 떼기까지 102일이 걸렸다. 지난해부터 친형인 신동주(62) SDJ코퍼레이션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에 시달려 온 신 회장은 백척간두의 심정으로 검찰 처분을 기다리게 됐다.
2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은 신 회장 출석 2시간 전부터 외신을 비롯한 150여명의 취재진들로 붐볐다. 롯데 관계자들 수십명은 선발대로 나와 ‘신 회장 맞이’에 분주했다. 이들은 취재진에 포토라인을 넘어 신 회장을 밀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거듭 협조를 부탁했다.
신 회장을 기다리는 인파 중에는 롯데건설로부터 100억원대의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하도급 업체 대표도 있었다. 자신을 신격호(94) 총괄회장의 조카라 소개한 서모(54·여)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신 총괄회장이 낸 부의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신 회장은 소환 예정시간인 오전 9시30분보다 11분 일찍 모습을 나타냈다. 검정색 제네시스 차량에서 내린 신 회장은 변호사 및 수행원 4∼5명과 함께 지정된 포토라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포토라인에 멈춰선 신 회장은 한 차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정면을 응시했다. 뒷짐을 지었던 손을 앞으로 포갰다.
준비해온 말이 있는지 묻는 취재진에 잠깐 머뭇거린 신 회장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검찰 수사에는 성실히 협조하겠습니다”고 말했다. 또박또박 말했지만 어색함이 묻어 있는 한국말이었다. 신 회장은 횡령 및 배임, 롯데건설 비자금 의혹에 대한 질문엔 별다른 해명 없이 “검찰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답 중간에 시위 중이던 서씨가 가져온 유인물을 던져 소란이 일었다. 검찰 직원에 의해 곧바로 제지당했지만 서씨는 끝까지 “오빠, 다 알고 있으면서”를 외쳤다. 신 회장은 날아오는 A4용지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신 회장은 잠깐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이어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청사에 도착해서 조사실로 향하는데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검찰은 이날 검사 2명으로 구성된 2개 조사팀을 투입해 신 회장을 상대로 2000억원대 배임 및 횡령, 탈세 의혹 전반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계열사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 롯데건설 등 계열사의 수백억원대 비자금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는지 여부도 조사했다. 조사는 일본어 통역 없이 한국어로 직접 이뤄졌다. 식사는 롯데 측이 준비한 도시락으로 대체했다.
검찰은 신 회장의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고심하고 있다. 일단은 구속영장 청구에 무게가 쏠리지만, 롯데의 경영권 문제 등을 고려해 불구속 기소로 마무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 관계자는 “롯데 경영권 문제는 신병처리 결정에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면서도 “꼭 검찰의 시각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신 회장의 사법처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신영자(74)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신격호 총괄회장, 신동주 회장, 신 총괄회장의 셋째부인 서미경(57)씨 등 롯데그룹 총수 일가 5명이 법정에 서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그래픽=박동민 기자
신동빈, 일본어 통역 없이 한국어로… 檢, 배임·횡령 집중 추궁
입력 2016-09-21 0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