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명희] 현정은과 최은영

입력 2016-09-19 18:20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고위 공직자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차이점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독기’였다. 회사가 생사기로에 놓였던 같은 해운업체이지만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임직원들의 태도는 180도 달랐단다. 현대상선 임직원들은 자사주를 매입하고 금융권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한진해운 임직원들은 설마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업체를 죽일 수 있겠느냐는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을 믿고 태평했다. 오너는 회사가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가기 직전 주식을 팔아치우는 등 저 살 궁리만 했다.

현대상선이 법정관리 직전 현대증권을 팔아 기사회생한 반면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라는 정반대 길을 걷게 된 데는 오너 최고경영자(CEO)의 책임이 크다. 현대상선을 이끄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비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회사를 떠맡게 된 공통점을 안고 있다. 유교적 가풍이 엄격했던 현대가 며느리들처럼 현 회장은 2003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민간 봉사단체 회원들과 독거노인들의 빨래를 해주러 다니고 봉사단체 사무실 바닥 청소와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던 아줌마였다.

하지만 경영 일선에 나선 뒤에는 뚝심 있게 변신했다.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시숙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싸우기도 했고, 남북관계가 냉랭해진 와중에도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업인 대북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대상선이 위기에 처하자 경영권을 포기하고 대주주 감자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300억원의 사재를 내놓았다. 알짜 계열사인 현대증권 매각이라는 승부수도 던졌다. 용선료 협상을 위해 선주에게 직접 이메일도 보냈다.

2006년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사망하면서 경영 일선에 나선 최 전 회장은 7년간 빚만 늘려놔 한진해운을 망하게 한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한술 더 떠 나쁜 ‘먹튀’ CEO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업적자가 3000억원을 넘는 데도 거액의 보수를 받고 퇴직금 산정 기준을 높이는 등의 방법으로 153억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빼갔다. 한진해운이 재무구조 정상화를 위해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직전에는 본인과 두 딸의 보유 주식을 모두 매각해 수십억원을 챙겼다. 배가 침몰하는데도 자신만 살겠다고 빠져나온 세월호 선장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 청문회에 나와서 한다는 말이 “제가 주부로 집에만 있다 나와서 전문성이 부족했다”는 거다. 주부들은 모두 ‘바보’란 소린가.

최 전 회장은 한진해운으로부터 임대료를 받고 있는 유수홀딩스와 한진해운의 전산망을 관리하는 싸이버로지텍 등 알짜배기 회사를 보유해 여전히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청문회 내내 국회의원들의 책임 추궁과 사재 출연 압박이 이어졌지만 끝내 대답을 비켜갔다. 그러면서 연신 눈물만 훔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또한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나 의심을 사고 있는 점이다. 최근 인터넷에선 청문회에서 최 전 회장이 눈물 흘리는 모습과 청문회 정회시간에 최 전 회장이 증인석에서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과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포착된 사진이 나돌아 또 한번 분노를 일으켰다.

최 전 회장이 뒤늦게 사재 100억원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흙수저’들은 꿈도 못 꾸는 최고 자리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한 여성 CEO의 모습을 보면서 혹여나 여성 능력을 폄하하는 빌미가 되지 않을까 노파심이 인다. 구중궁궐에 갇혀 눈 귀 다 막고 ‘마이웨이’를 고집하는 어느 분의 사례와 함께.

이명희 디지털뉴스센터장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