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범죄자만 치는 주먹?… 필리핀의 ‘두테르테 신드롬’

입력 2016-09-19 17:13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마닐라 동부 타나이 군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의 초법적 '마약과의 전쟁'에 역풍도 거세다. 무차별적 살인을 멈추라고 부르짖는 시위(아래 왼쪽·가운데 사진)가 마닐라 거리에서 이어졌고, 의회 청문회에 마약 소탕전 희생자 가족이 얼굴을 가린 채 나와 억울함을 호소했다(오른쪽 사진). AP뉴시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분명히 흥미진진한(colorful)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71) 필리핀 대통령을 두고 한 말이다. 오바마는 두테르테가 지난 5일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것에 아연실색해 다음날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오바마의 말대로 두테르테는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인물이어서 세계 주요 언론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정상회담 취소 사태를 야기한 거친 언행과 극단적인 정책이 주로 부각된다. 서구 언론과 국제 인권단체는 우려 가득한 시선으로 두테르테와 필리핀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필리핀 경제는 호황이고 두테르테의 국내 인기는 매우 높다. 나라 안팎 시선의 온도차가 극심한 기현상이다.



살인면허를 주는 사나이

국제사회의 관심과 비난이 집중된 두테르테의 정책은 초(超)사법적인 ‘마약과의 전쟁’이다. 그가 취임한 지난 6월 30일 이후 3200명이 넘는 마약중개상과 중독자가 경찰과 자경단, 청부살인업자에게 살해됐다. 두테르테가 “마약상이나 중독자를 알고 있다면 직접 가서 죽이라”고 독려한 결과다. 마약중독으로 심신이 파괴된 국민이 수백만명에 달해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러나 인권과 법치 관점으로 보면 경악할 조치다. 살해된 마약 용의자 중 절반 이상이 자경단이나 청부살인업자의 총에 숨졌다. 최근 영국 BBC방송은 청부살인 조직의 일원으로 마약 용의자 6명을 살해했다는 현지 여성 마리아(가명)를 인터뷰했다. 마닐라 빈민가 출신으로 변변한 직업이 없던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킬러가 됐다. 그는 “우리의 보스는 경찰”이라고 밝혔다. 마약사범 1명을 죽이면 2만 페소(약 48만원)를 받는다. 현지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꽤 짭짤한 돈벌이다. 두테르테의 마약전쟁 덕분에 이들 부부가 속한 조직은 그야말로 대목을 맞았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거리에서의 무분별한 살인을 중단하고 재판을 통해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오바마도 “무고한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 올바른 방식을 택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개의치 않는다. “내정에 간섭 말라”며 발끈한다. 그는 미국 대통령부터 교황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개자식(son of a bitch)’ 같은 험한 욕설을 내뱉는다.



필리핀 국민 91%가 지지

언행은 거칠고 정책은 살벌한데 필리핀에서 두테르테의 인기는 대단하다. 지난 7월 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91%를 기록했다. 5월 대선 때 득표율 39%를 감안하면 취임 후 지지율이 2배 넘게 치솟은 것이다. 만연한 범죄와 부패에 지친 국민은 ‘범죄와 부패 일소’를 약속한 두테르테를 지도자로 택했고, 약속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모습에 환호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부패와의 전쟁에도 나섰다. 역시 파격적인 방식이다. 지난달 21일 전 정권 대통령이 임명한 공무원 6000여명에게 사직서를 내라고 통보했다. 일괄 사표를 받은 뒤 능력과 청렴도를 따져 선별 수리하기로 했다.

일부 특권을 내려놓는 행보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달 두테르테는 대통령 전용기 중 국내용 기종을 병원 환자 수송기로 쓰라고 지시했다. 그는 “나는 필리핀항공이나 세부항공을 타는 게 편하다. (이들 민항기가) 사고를 낸 지도 오래됐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대통령 전용 요트도 ‘선상병원’으로 전용키로 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조지프 에스트라다 등 전 대통령이 호화 선상 파티를 열었던 요트다.



7% 고성장 경제도 주목

필리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분기 필리핀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7.0% 증가했다. 3년 만에 최고치이며 아시아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중국(6.7%) 베트남(5.6%) 말레이시아(4.0%) 태국(3.5%)을 모두 앞섰다. 에르네스토 페르니아 경제기획장관은 “올해 성장률 목표인 7∼8%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징 타이거’(떠오르는 호랑이)로 불리는 필리핀 경제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를 대신하는 신흥 경제세력 ‘VIP’(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일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제발전 기반은 전임 베니그노 아키노 정권이 닦았다. 아키노 대통령이 재임한 2010∼2015년 연평균 6.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민관 협력사업으로 인프라를 확충했고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도 크게 늘렸다. 두테르테도 아키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인프라 투자 확대와 외국인 투자유치 노력을 지속하면서 소득세·법인세 감면을 추진할 방침이다.

기업에는 이런 정책 기조가 긍정적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필리핀 최대 패스트푸드 업체 졸리비의 한 임원은 “새 정부의 기업 친화적 경제 어젠다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필리핀 최대 은행 BDO유니뱅크 고위 관계자도 “이 정권에서 비즈니스는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난폭하기 그지없는 마약전쟁도 심각한 사회악을 과감하게 도려낸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국민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해진 정부는 경제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다.

베어링자산운용의 수하이 림 매니저는 “전반적으로 보면 투자자들이 논쟁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새 대통령을 좋게 본다. 경제에 관해선 특히 그렇다”고 말했다. 삼성자산운용 홍콩법인 앨런 리처드슨 매니저도 “분명하고 일관된 정책 수행은 기업과 투자자에게 신뢰를 준다”며 “두테르테는 취임 100일이 지나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 쓰는 젊은 인력이 자산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필리핀은 높은 영어 구사력과 젊고 저렴한 인력이 큰 자산이다. 영어 사용 인구는 전체의 64%에 달한다. 필리핀 평균 연령은 23세로 아시아 주요국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1억 인구 중 3분의 2가 노동인구(15∼64세)다. 필리핀 정부는 2030년까지 인구가 1억2500만명으로 늘고 이 중 70%를 노동인구로 전망했다.

필리핀은 국내 산업 인프라가 미비해 해외로 나간 근로자가 많다. 인구의 10%에 달하는 해외 근로자의 송금액이 필리핀 GDP의 9%를 차지한다. 이 돈은 가계소비의 원천이다.

제조업 기반과 인프라가 취약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고부가가치 BPO(업무처리 아웃소싱) 산업이 발달했다. 마닐라에서 소프트웨어 분석 업무를 하는 27세 여성 조안 부르고니오는 “내 관심사는 교통 인프라”라고 말했다. 버스를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열악한 출퇴근 여건에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두테르테는 지금 마약 문제에 골몰하고 있지만 관심사가 인프라로 옮겨가기를 바란다”며 “대선 때 그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