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변하는 명절문화… 가족보다 개인 중심

입력 2016-09-14 04:03

한모(27)씨네 가족은 이번 추석 연휴에 ‘전 만들기’를 맡았다. 한씨 아버지는 5남매 가운데 막내인데, 다섯 식구가 각각 명절 음식을 준비해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큰아버지네 가족이 고기 요리를 맡으면, 둘째 큰아버지네 가족이 생선 요리를 맡는 식이다. 막내인 한씨네는 이번 명절 동그랑땡 등 전을 맡았다. 한씨네는 귀성 전날인 13일 다 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고향에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한씨 아버지는 “온 가족이 일을 나눠 다 같이 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면서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쉬는 명절’ ‘아내도 쉴 수 있는 명절’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2년차 황모(30)씨는 ‘회사 당직’을 핑계로 추석 당일에만 고향에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혼자 조용히 서울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다. 연휴 기간에 회사 당직을 서면 하루 10만원 정도의 위로금이 나온다고 한다. 평소처럼 바쁘지도 않고 긴급 상황에만 대응하면 된다. 황씨는 “어색한 친척들과 만나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등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돈을 받고 회사에 나왔다가 퇴근하고 그동안 못 본 영화를 보는 게 훨씬 유익하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24·여)씨는 추석 당일인 15일 외가와 친가를 모두 다녀온 뒤 나머지 휴일은 휴일답게 보낼 계획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주말에는 고생한 엄마를 모시고 외식도 할 생각이다. 이씨는 “하루에 모든 일을 끝내고 나머지는 개인적인 휴식을 즐기면서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명절 풍경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가족’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고, 명절을 ‘휴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지난 2월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1.3%가 ‘명절이라고 항상 가족들이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74.3%는 ‘명절은 휴일이다’라는 항목에 동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준비생들에게 명절은 여전한 스트레스다. 이들은 ‘명절 대피소’를 찾기도 한다. 파고다어학원은 지난 추석연휴 때부터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원을 일부 개방해 명절 대피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 추석 때는 14일부터 5일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빵과 음료 등 간단한 간식도 제공한다. 이번 추석에는 1500명 정도가 명절 대피소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추석 때는 700여명이, 지난 설에는 1000여명이 대피소를 찾았다. 학원 관계자는 “취업준비생이나 대학생들이 연휴 때 친척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서 대피소라는 이름을 지어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추석 성인남녀 304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2.9%만이 추석 연휴가 ‘반갑고 기다려진다’고 답했다. 반면 36.2%는 ‘스트레스를 받아 기다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친척의 안부와 잔소리’가 주된 이유였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인정 방식의 변화’로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한다. 부모 세대는 친척 등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반면 젊은 세대는 SNS 등을 통해 주변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더 크다. 젊은 세대는 많은 친척이 모이는 명절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본다. 취직·결혼 등 젊은 세대의 고민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다. 이 교수는 “취업이나 결혼은 사회 구조적 문제인데 부모 세대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계속 물어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새롭게 변하고 있는 명절의 의미에 맞게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명절문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더 이상 가족 공동체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얻기 힘들어졌다. 개인의 삶은 개인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명절을 휴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명절과 가족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이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서로를 배려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지켜나갈지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김판 오주환 기자 pan@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