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재야미술’인 실험미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2016 부산비엔날레에선 ‘한·중·일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타이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서울의 주요 갤러리에서는 당시 전위예술의 주역인 김구림(80)·이건용(74)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왜 지금, 실험미술인가
1970년을 전후해 한국 미술계엔 회화, 조각 같은 전통 장르를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가 분출했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해프닝), 대지미술, 실험영화 같은 이른바 전위예술이다. AG(아방가르드), ST(스페이스 타임), 제4그룹 같은 소그룹이 구심점이 됐으며, 김구림, 이건용, 이승택, 성완경, 최병소, 하종현 등이 참가했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70년대 초반 이후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대상이던 시대, 기존 제도에 대한 반기가 속성인 전위예술이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위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미술은 향후 전시를 불허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경복궁 내 국립현대미술관 마당에서 한 이건용의 땅파기 퍼포먼스(‘신체항’),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을 상갓집처럼 광목으로 둘러싸는 김구림의 퍼포먼스(‘현상에서 흔적으로’) 등이 그런 예이다. AG, 제4그룹 등 소그룹은 해체됐고, 한국 현대미술은 단색조의 추상미술로 빠르게 수렴되고 말았다.
‘전성기 흔적’ vs ‘노익장 실험미술’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초청받아 심야에 파리에 도착한 이건용은 당황했다. “큰일 났네. 통금이 지났는데….” 파리엔 통행금지가 없다는 걸 이내 알았지만, 처한 시대적 상황은 개인의 몸에 각인돼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가 전한 일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용: 이벤트-로지컬’전에는 ‘장소의 논리’ ‘건빵먹기’ ‘달팽이걸음’ 등 그의 전성기인 1975∼79년 행해진 퍼포먼스를 재연한다. 당시의 기록사진도 나와 청년 이건용의 도발적이면서도 진지했던 모습을 전한다.
퍼포먼스의 결과물인 신체드로잉 대표작품도 대거 나왔다. 베니어합판 너머로 손을 뻗어 선을 긋거나, 팔에 부목을 대고 일부러 불편하게 해 선을 긋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신체에 한계를 가함으로써 나온 드로잉들이다. 당시 정권의 사상 통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10월 16일까지.
60년대 중반부터 플라스틱, 기계부품, 비닐 등을 사용하며 매체실험을 해오던 김구림은 69년 결성한 실험그룹인 제4집단을 이끌며 파격적인 장르 해체 실험을 했다. 서구 종속을 탈피해 한국 미술을 주체적으로 계승하자며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가두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그러나 행사는 저지당했고, 그는 결국 한국을 등지고 ‘미술망명’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살았다. 2000년 귀국 이후에도 10여년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회고전을 고비로 노익장 투혼을 보여주고 있다.
갤러리현대 인근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삶과 죽음의 흔적’은 신작 발표장이다. 관, 플라스틱 해골, 흙, 신발, 뱀과 개구리 모형 등 오브제를 활용해 ‘음양 시리즈’ 설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죽음의 경시, 쾌락 만능에 대한 개탄이 담겼다.
지하 전시실에 설치된 ‘음양-배’가 압권이다. 호수의 심연 같은 바닥에 물에 비춰진 듯한 하늘이 무심하게 펼쳐져 있고, 그 한 가운데 해골이 담긴 배가 한 척 있다. 시리아 난민 소년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재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질타한다. 10월 16일까지.
글·사진=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1970년대 실험미술의 두 기수, 노익장 투혼 불사르다
입력 2016-09-18 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