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9일 만에 쓴 ‘쉬운 페미니즘’ 서점가 돌풍

입력 2016-09-18 18:51 수정 2016-09-18 21:10
페미니즘 분야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저자 이민경씨. 이씨는 국내 페미니즘 도서 시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신흥 저자이자 ‘쉬운 페미니즘’의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이민경 제공
페미니즘 바람이 뜨겁다. 서점가에서도 페미니즘 책들이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를 장악하고 있다. 지난 3월 번역 출간된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가 거의 반 년간 이 분야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근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지난 7월 초 나온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봄알람·사진)가 그것으로 두 달 만에 1만1000부가 팔렸다.

시집 크기에 2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얇은 책은 24세 여성 대학원생 이민경씨의 첫 책이다. 이씨는 9일 만에 원고를 완성했고, 친구들과 출판사를 차려 한 달 만에 책을 출간했다. 출간 비용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조달했으며, 초기엔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에서만 책을 판매했다. 독립출판물로 출발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희귀한 사례다.

이씨는 외국 저자들이나 국내 몇몇 여성학자들이 주도하는 페미니즘 도서 시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새 얼굴이다. 또 현재 20대 여성들을 흡수하고 있는 ‘쉬운 페미니즘’의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이씨는 페미니즘 전공자가 아니다. 현재 통번역대학원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있다. 이씨는 20대가 되어 페미니즘을 자신의 언어로 발견하게 된 경우로 혼자 책을 읽고 강좌를 찾아다니면서 독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페미니즘 학자도 아니고 책을 여러 권 쓴 기성 저자도 아닌 20대 대학원생이 처음 써서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낸 책이 현재 페미니즘 분야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 된 것이다.

책의 콘셉트와 구성도 독특하다. 이 책의 부제는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입트페)인데,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차별적 언어(대화)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이씨는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대응 매뉴얼’, ‘페미니스트의 대화법’,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 등으로 책을 설명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실용적인 관점에서 써진 페미니즘 책은 없었다.

이씨는 “여성들에게는 남자들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얘기할 때 울렁증이 있다”면서 “자꾸 위축된다거나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서 젊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라고 생각해 책을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책에서 “반드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전까지 여성들이 고려하지 않았던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한다. ‘나쁜 의도를 가진’, ‘무례한’, 또는 ‘얄팍한’ 남자들의 질문에는 굳이 답변하느라 힘과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무엇이 차별인지는 당신이 정한다”, “뭘 모르는 쪽은 당신이 아니다”라며 여성들이 느끼는 차별이나 불쾌감이 정당하다는 걸 알려준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게 적절할까?’, ‘과격한 노선을 취하면 우리 편을 잃는 게 아닐까?’ 등 페미니즘에 대한 익숙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한다.

책 구매자들은 20대 여성들이 60%쯤 차지한다. 20대 여성이 쓴 책을 20대 여성들이 읽고 있는 것이다. 이씨는 “여성들에겐 페미니즘이 모국어와 같다”면서 “다만 어떻게 얘기할지 몰라 그동안 힘들어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달 초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한다. 한국 페미니즘의 계보에 대한 문답집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책이다. 그는 “앞으로도 쉬운 페미니즘을 위한 책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