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준동] 한가위의 달빛

입력 2016-09-12 17:28

지난여름은 참 힘들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일상은 인내의 연속이었다.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아∼ 지긋지긋한 이 더위는 언제 가는 거야’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유난했던 더위를 뒤로하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차가울 정도다. 언제나 지나봐야 느낀다. 세월의 무상함을.

그렇게 가을이 오더니 어느덧 한가위도 코앞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넉넉함이 다시 설레게 한다. 머릿속 저편에서 아련한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송편을 빚고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낯익은 장면이 오버랩된다. 추석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 못내 씁쓸하지만 그래도 소망하고 그려본다.

부모님의 포근한 정(情)에다 고향의 아련한 추억에 흠뻑 젖고 싶은 시기다. ‘힐링의 시간’ 한가위다. 이맘때면 정성스럽게 장만한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게다. 벌써 고속버스터미널로, 기차역 등으로 달려가는 3700여만명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에 나오는 한가위 장면을 그리면서 말이다.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은 정겨운 시간이기도 하지만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넉넉한 둥근 달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사색의 시간’인 셈이다. 통렬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기도 한다.

옛 성인들은 언제나 ‘부끄러운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맹자(孟子)는 군자가 지켜야 할 4가지 덕목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얘기하면서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 ‘사람에게 있어서 부끄러워함은 중대한 일(恥之於人大矣 盡心上)’이라고 설파했다. 주자(朱子)는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면 위정자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으나 부끄러운 마음을 잃어버리면 짐승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기 쉽다”고 부연 설명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하는 것은 인간의 덕목 중 으뜸이며 정치적 덕목이라고 공자는 역설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지도자들에게서 부끄러움, 즉 염치란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마음은커녕, 무엇이 잘못이냐고 되레 역공을 서슴지 않는다. 불법과 비리, 향응, 청탁, ‘스폰서’ 등 편법적 행태가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정의가 바로 세워질 리 만무하다. 권력 주변을 서성이는 ‘두꺼운’ 얼굴이 많아지고, 감정적 언어도 난무한다. 현실은 녹록지 않은데 우리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일본의 유명작가 시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을 보면 사회적 위기는 ‘집단적 타락 증후군’에서 온다고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잇단 부정을 보고 일반인들도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는 계기로 만들 때 사회는 타락하고 위기를 맞게 된다는 얘기다.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얼굴. 아, 추석이구나.’(유자효의 시 ‘추석’)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에도 잠 못 이루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염치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발하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한가위에 자성으로 이끄는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겠다.

김준동 사회2부장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