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향수라는 말의 정체

입력 2016-09-11 18:52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윗집, 아랫집 혹은 옆집에서 끓이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 날이 있다. 약간 선선한 바람이 불고, 풍속과 풍향이 딱 나에게 어린 날의 그리움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일요일 아침. 텔레비전에선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부엌에선 파를 써는 엄마의 도마질 소리가 탁, 탁, 탁….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얼마 전에 바뀐, 새 홑청을 시침해준 두꺼운 이불로 동생과 함께 이불 굴을 만든다. 그리고 이제는 금발머리가 너무 헝클어져 빗겨지지 않는 ‘미미’와 어제 새로 가위질해놓은 ‘보라’와 ‘엘리제’가 있는 와이셔츠 상자를 가져온다. 나와 동생은 미미와 종이인형을 아버지의 와이셔츠 상자에 담아 보관하곤 하였다. 우리는 이불 굴 안에서 ‘메텔 놀이’를 한다. ‘시어머니며느리 놀이’도 한다. 나에겐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완벽하고 안전하고 평화롭다. 그런 인식을 하는 순간이면 나는 너무 좋아서 슬픈 생각이 든다. 이것은 혹시 꿈일까?

나도 김치찌개 끓일 줄 알고, 된장찌개 끓일 줄 아는데. 나도 이젠 ‘그런 엄마’가 되어 있는데, 어째서 남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찌개 냄새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북받치는 감정을 일게 하는지. 나도 노래 부를 줄 알고 나도 웃을 줄 아는데, 남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나 웃음소리가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희한한 일이다.

나의 오랜 친구 둘은 지금 각각 일본과 미국에 산다. 우리 셋은 메신저로 대화를 자주 하는데, 가끔 내가 집에서 밥 먹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들의 장탄식이 이어진다. 한국에서 자란 시간보다 그 나라에서 지낸 시간이 이제는 더 긴 그녀들인데. 아직도 김치와 된장찌개 냄새는 너무나 그리운 냄새라는 것이다. 김치와 된장 같은 것은 근처 한인마트에서도 판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어린 날 ‘이불 굴 속’에서 느끼던 그 충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어서,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유형진(시인),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