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유랑민들 비소카 자브로쉬! 그래도 추석은 즐거워

입력 2016-09-12 20:21
고려인 가족들이 12일 광주 월곡동 고려인마을 지원센터에서 한국의 전통놀이인 윷놀이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광주=곽경근 선임기자
고려인 어린이들이 12일 광주 양동시장을 찾아 어른들과 함께 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광주=곽경근 선임기자
어린이들이 고려인마을 지원센터 앞에서 제기차기를 배우는 모습. 광주=곽경근 선임기자
“비소카 자브로쉬!(높이 던져라!)”

추석 연휴를 앞둔 12일 오후 광주 월곡동 고려인 마을. 3000여명의 고려인들이 정착해 사는 이 마을은 이미 풍성한 한가위 분위기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형형색색 고운 한복으로 곱게 차려 입은 아이들은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에 모여 윷놀이를 배우고 즐기는 동안 연방 웃음꽃을 피웠다.

생소한 전통놀이지만 4개의 윷이 공중으로 던져지고 앞서 가던 상대방 윷말을 자기편 뒷말이 금세 따라잡을 때마다 아이들은 “하하하∼ 깔깔깔∼”하고 자신의 배꼽을 잡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1개월여 전 한국 땅을 밟은 루스라나(9)양은 “한복을 입고 나무토막을 던지는 윷놀이를 난생 처음 해봤다”며 “최대의 명절을 어떻게 쇠는지 무척 궁금하다”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루스라나양과 윷판에서 실력을 겨루던 니키타(9)군은 “윷을 던지는 게 그냥 신난다”며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무조건 추석이 좋다”고 서툰 한국말 솜씨를 뽐냈다. 두 친구의 윷판을 구경하던 비올레따(10)양은 “며칠 전에는 어른들 손을 잡고 전통시장인 광주 양동시장에 처음 다녀왔다”며 “날마다 한가위였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흥겨운 윷놀이를 마친 아이들은 고려인 한마당 잔치에서 마을 어른들과 외지 방문객들에게 선보일 전통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연습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어른들도 막바지 추석 음식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었다. 귀국 전 살던 나라의 전통음식뿐 아니라 고국의 음식으로 합동상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시나브로 형성된 고려인 마을에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건너 온 고려인 3∼5세대 30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고려인들이 월곡동에 터를 잡기 시작한 건 공단과 가까워 출퇴근이 쉬운 데다 먼저 정착한 이들이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 등을 세워 자녀교육이 다른 곳보다 원활해져서다.

현재 광주 지역에는 공식 등록된 고려인 1400여명과 미등록 고려인이 1600여명에 이른다.

고려인들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사이에 두만강 북방 연해주로 농업이민과 강제동원, 항일독립운동 등을 위해 이주한 한인들이다. 일제강점기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고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고려인이라고 한다. 고려인을 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라고 부른다.

고려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새날학교를 운영 중인 이천영(고려인마을교회) 목사는 “국내에서 생활하는 고려인은 현재 4만명으로 추산된다”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숫자까지 감안해 10% 정도가 광주 월곡동을 근거지로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은 정착민들이 늘면서 2013년부터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와 하남제2어린이공원 등에서 추석맞이 축제를 개최해 왔다.

축제는 고려인 전통음식 만들기, 전통예술행사, 한국 음식 만들기, 한국노래경연대회, 장기자랑 등으로 다채롭게 꾸려진다. 주민들은 축제에서 자신이 살던 각국 전통의상을 입고 정성들여 만든 전통음식을 나눠 먹으며 고국의 한가위를 만끽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지난 6일 개국식을 갖고 방송에 들어간 소출력 라디오방송국 ‘고려FM’이 조상의 땅에서 개최되는 흥겨운 추석 잔치를 국내는 물론 러시아 등 각국 동포들에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처음으로 생생히 전하게 된다.

고려인 마을 신조야 대표는 “3년 기한의 방문취업비자를 발급받아 고국에 돌아오는 고려인들이 대부분”이라며 “정처 없는 유랑민 신세를 벗어나 고려인들이 안심하고 고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