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법정관리에 대비 최소한의 조치도 안 했다

입력 2016-09-09 00:05

화주들의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가운데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대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관리를 위한 스테이오더(압류금지명령) 신청 준비도 하지 않은 데다 물류대란을 막을 최소한의 운영자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업체의 늑장대응에 따른 화주 피해는 1억 달러를 넘어섰다.

한진해운은 법정관리 신청 시 각국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 스테이오더 문서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서류는 채권자의 강제집행 금지명령을 포함한 내용으로 외국 법원에 요청하면 선박 가압류 등을 막을 수 있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8일 “각 나라 에이전트를 통해 스테이오더 문서를 준비하는데, 서류를 만드는 것 자체가 소문이 나면 영업에 타격을 받을 수 있어 준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리 각국 변호사를 통해 서류를 준비할 수 있었음에도 문서가 발견되면 법정관리로 갈 것이란 인식이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이 스테이오더를 신청한다고 한 43개국 중 허가를 받은 국가는 8일 기준 일본, 영국, 미국 등 3곳에 불과하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예상해 스테이오더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면 선박 가압류 등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준비가 안 됐다면 화물들은 국제 미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의 운영자금이 고갈돼 최소한의 혼선방지를 위한 실탄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 한진해운은 정부의 압박에 따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재(400억원)와 미국 롱비치터미널 등 해외터미널 지분을 담보로 한 자금지원(600억원)을 내놓기로 한 것 외에 자금동원을 통한 사전 조치는 전혀 없었다. 화주협의회 관계자는 “보통 운영자금을 남겨 놓으면 자금을 통해 하역이 불가능한 일은 막을 수 있다”며 “그런 자금도 없었다는 것은 한진해운이 전혀 법정관리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기존 법정관리에 들어간 해운업체들과 비교해도 차이가 난다.

2013년 같은 상황에 처했던 STX팬오션은 선박 억류나 입출항 거부에 따른 물류 혼란을 법원 승인 후 자사 운영자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일부 해결했다. 법정관리 당시 2000억원의 자금을 남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한해운은 600억원의 운영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진해운의 사전 대비 부족으로 인해 애꿎은 화주들의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8일 오전 9시 기준 피해 신고가 220건으로 전날보다 26.8%(59건) 늘었다고 밝혔다. 피해 추산금액은 법정관리 개시 후 처음으로 1억 달러(1093억원)를 넘었다. 한진해운도 8일 89척(컨테이너선 73척, 벌크선 16척)이 26개국 51개 항만에서 가압류, 공해상 대기, 항구에 정박하지 못하는 등 비정상 운항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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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