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범죄엔 추상같던 검사가… “계좌번호 알려줄게”
입력 2016-09-08 04:02
“감시 역할을 하는 현직 직원의 불법 검은 뒷돈 거래 적발…전문직역 종사자들의 심각한 모럴해저드 확인.”
지난해 12월 3일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이끌던 김형준(46) 부장검사는 이러한 설명과 함께 증권사들의 블록딜 비리 수사결과를 보도자료로 공개했다. ‘전문직역 검은돈 탐욕으로부터 일반 투자자 보호’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는 보도자료에서 “범죄로 인한 수익은 반드시 박탈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자평했다.
이런 그는 나흘 뒤 사업가인 고교 동창 김모(46·구속)씨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계좌번호 알려줄게, 지난번 이야기한 것 조치 가능할까?” 김씨가 계좌와 액수, 예금주를 묻자 김 부장검사는 이렇게 답했다. “이번주 내년초 것 한 번에 챙겨주면 좋고.”
검사 하나 밥 먹이기 쉬운 줄 아냐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김 부장검사의 ‘원칙 수사’를 가혹하게 기억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간 금융권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일들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어 ‘여의도 토벌 작전’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여의도 증권가를 ‘블루오션’으로 여기는 듯했다”고 당시 검찰의 분위기를 기억했다. 그런 김 부장검사가 사업가 동창에게 돈을 요구해 받았고, 거액이 내연녀에게 흘러갔다는 정황까지 나오자 증권가는 어색해한다.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으로 알려진 김 부장검사의 언행은 공직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조브로커에 가깝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그는 지난 6월 사기·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김씨와 대화하며 사건 관계인들과 친분을 쌓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는 “내가 자연스럽게 안면 트려고 서부(지검) 부장 다 불러서 밥을 먹는다”며 “대뜸 얘기하면 반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검사 하나 밥 먹이기 쉬운지 아느냐”며 “자연스럽게 하려고 밥도 먹고 여러 작업도 한다. 친구가 이렇게 고생하고 노력하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작업’은 친구인 김씨보다는 스스로를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 부장검사는 지난 6월 25일 김씨를 수사하던 박모 검사를 따로 만났다. 박 검사와 친분이 있는 다른 지방의 검사들까지 함께 불러 겨우 마련한 자리였다. 김 부장검사는 이때 자신에게까지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무마하려 했다.
김 부장검사는 박 검사에게 “선배(로서) 괜히 쓸데없는 거, 불필요하게 오해하거나 그럴 거 같아서 얘기 안 했는데 분명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박 검사로부터 “자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김씨에게 전했다. 당시 서부지검은 김씨를 수사하던 중 김 부장검사와의 부적절한 금전 거래를 발견해 이미 대검찰청에 보고를 한 상황이었다.
내겐 안 보이던 모럴해저드
김씨가 자신의 신병이 구속될까 불안해하면 김 부장검사는 검사들과의 만남을 거론하며 “내가 그냥 밥만 먹고 왔겠느냐”고 했다. “29년 30년 공동운명체.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사람은 나”라고도 말했고, 전관 변호사에 대한 언급도 이어졌다. 김 부장검사는 자신이 서부지검뿐 아니라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의 간부까지 만난다고 김씨에게 전했다. 김씨는 지난 4월 서부지검에 이어 고양지청에서도 사기 혐의 고소장이 접수된 상태였다.
녹취록에서는 이 고양지청 고소가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공개돼 있다. 김씨는 김 부장검사의 사법연수원 동기가 차장으로 있는 고양지청에 고소장이 접수되도록 조언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정작 김 부장검사가 고양지청에서 한 말은 “철저하게 수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내가 서부지검 부장들을 다 여의도 메리어트 식당에 불러서 자연스레 친해졌겠느냐”던 김 부장검사의 언급은 의미 있다는 평가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지난 5월부터 김씨와 관련한 계좌추적 압수수색 영장을 2차례 신청했지만 검찰에서 반려당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김 부장검사의 비위 관련 내용이 보고됐지만 대검의 감찰은 지난 2일 시작됐다는 점이 드러나며 ‘늑장 감찰’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대검찰청은 부적절한 측면이 전혀 없었다는 입장이다. 보완 수사 필요성, 여러 건의 고소 사건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영장 반려가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 이후 검찰이 김씨에 대한 차명계좌 추적·분석을 2차례에 걸쳐 했고, 의혹이 커지자 김 부장검사 감찰에 착수했다고 대검은 밝혔다. 당시 김씨는 지금 주장과 달리 1500만원을 김 부장검사에게 빌려준 사실 자체가 없다고 진술했다.
글=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