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망가졌다. 최소한 정치적·사회적 현실은 그렇다. 1945년 이후 극심한 좌우 대립과 전쟁까지 겪었음에도 보수 세력은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산업화를 이뤄냈다. 한때 능력 있고 책임 있는 기관차 역할도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그나마 여기까지 온 데 대해 보수 세력의 기여도를 무시할 순 없다. 물론 보수 세력을 기반으로 한 독재·권위주의 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기본 인권을 제한한 흑역사도 있었다. 보수의 공과다. 뚜렷한 업적이 있었던 보수가 어느 때부터인가 냉소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천박성과 탐욕이 민낯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법부와 검찰은 보수의 체제와 가치를 지키는 곳이다. 부정청탁과 몰래 변론, 주식 대박, 처가 부동산 비리 의혹에 이어 돈 받고 수사를 무마시키려 한 스폰서 부장검사가 또 나타났다. 역시 돈 받고 판결을 유리하게 해준 부장판사의 의혹은 또 뭔가. 이들은 단순한 개별적 사건인가. 그동안 인맥과 지연으로 얽혀 음습하게 만연된 짬짜미들이 ‘재수 없게’ 걸린 것은 아닌가. 처음 불거졌을 때 검찰이나 사법부의 첫 반응은 “뭐가 문제지?”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다던데”였다. 정의와 법치를 다루는 곳의 도덕적 마비다. 대기업 오너들이 감옥에 가고, 보수 세력들이 경제 회생을 위해 사면 요청을 하고, 오너 일가는 잇단 범죄 행위 속에서 수백억원씩 배당금을 챙기고…. 분노하지 않을 이 있을까. 개개인의 일탈은 있었을지언정 이런 천박함과 탐욕이 보수의 행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보수적 가치를 지키고, 사회 발전을 위한 보수 세력의 노력은 평가받을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왜 그런가.
보수의 정치가 무너진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어느 때부턴가 보수 정치는 가치와 지향점을 잃었다. 자리에 걸맞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은 내팽개쳐졌다. 결정적으로 보수의 리더십이 완전 실종됐다. 그 결과 보수 정치의 지도자급은 너나없이 자잘해졌다.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남북문제와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미래세대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하는 가치 지향적 담론에는 접근조차 못한다. 그저 내년 대선이 어떻고, 누구를 영입해야 하고, 누가 당권을 잡을 것이냐는 미시적·정치공학적 이익에만 매몰돼 있다. 그러니 친박의 공천 행태, 새누리당 안의 권력 싸움, 보수 진영 내의 자리 다툼, 어이없는 낙하산 인사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보수 진영 내 정치와 권력의 가벼움이 그대로 각 분야 보수 기득권층의 일탈을 부추긴 것이다.
보수적 성향의 원로 사회학자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고위층은 지위는 높지만 뿌리가 없고 역사성 도덕성 희생성이 결여돼 있어 천박한 언행으로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비난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권만 있고 의무는 저버린다는 그의 지적은 적확하다. 도덕적 하자가 조금 있다손 치더라도 예전에는 능력 하나만큼은 보수 세력이 내세울 만한 것이었다. 지금은 무능까지 겹쳤다.
보수는 정신적·물리적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 지역주의나 끼리끼리 문화가 아닌, 개방적 포용적 합리적 리더십을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사회적 책임감, 자기희생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는가, 왜 이렇게 공적 지위를 사적 이익에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가, 왜 이렇게 천박하고 파렴치한 행태를 보이는가. 통렬히 성찰하고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는 내년 대선이든, 그 이후의 정치든, 보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김명호 칼럼] 망가진 보수, 역사에 죄짓지 않으려면
입력 2016-09-06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