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의 폭력’이었다. 열아홉에 한 살 위 남자를 만나 결혼한 김영미(가명·49)씨는 3년 전 남편을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동안 남편의 폭력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참고 속으며 살아왔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김씨가 늦게 퇴근했다는 이유로 배를 발로 차고 노란색 테이프로 손발을 묶어 방에 가두었다. 김씨는 “‘이러다가 정말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흔히 부부싸움을 ‘칼로 물 베기’에 비유한다. 싸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화해한다는 의미다. 현실은 다르다. 가정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부부 사이에서 일어난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가정폭력으로 구속된 피의자 1118명 가운데 710명(63.5%)이 부부폭력 가해자였다. 전체 가정폭력의 3분의 2 수준이다.
끝없는 악순환 ‘부부 폭력’
부부간 폭력은 끝없이 ‘되풀이’되고, 그 강도도 점점 강해진다. 빚이 늘면서 지난해부터 부쩍 다투는 일이 잦아진 박모(53)씨와 아내 A씨(46)도 그랬다. 생활고로 스트레스를 받던 박씨는 A씨가 일을 하느라 살림에 소홀하다는 불만을 가졌다.
지난 4월 20일 박씨는 집 안에서 A씨와 말다툼을 했고 아들(19)이 말렸다. 이날 저녁 A씨와 아들이 잠들자 박씨는 소주병을 깬 뒤 이들을 깨워 무릎을 꿇게 했다. 박씨는 깨진 소주병을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향해 들이대며 “죽여버리겠다”고 소리 질렀다.
열흘 뒤 또 싸움이 벌어졌다. 아들이 나가는데 찌개를 데워주지 않는다는 게 다툼의 이유였다. 화가 난 박씨는 신발장에 있던 망치를 들고 와 A씨의 머리 왼쪽을 내려쳤다. A씨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자 박씨는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판사 이동욱)는 지난달 23일 살인미수와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박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A씨와 아들이 ‘처벌하지 말아 달라’는 탄원서를 냈지만 재판부는 “그동안 행동을 봤을 때 재범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여성가족부의 ‘2013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부간 폭력을 경험한 응답자 910명 가운데 68%가 가정폭력 당시 ‘그냥 있었다’고 답했다. 16.8%는 자리를 피하거나 집 밖으로 도망쳤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0.8%에 불과했다.
왜 가만히 있었을까. ‘그냥 있었다’고 응답한 사람 가운데 37.2%는 ‘그 순간만 넘기면 된다’고 대답했다. 35.3%는 ‘가족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부부’라는 고리가 족쇄가 돼 폭력을 당하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신상희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은 4일 “남성과 여성 모두 ‘부부’라는 관계를 고려해 폭력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부처럼 친밀한 사이일수록 폭력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참으면 터진다
부부간 폭력은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끝나기도 한다. 피해자나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등 사전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지만 수사·사법기관이 적극 대응하지 않은 탓에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사례가 많다.
지난 7월 서울 관악구의 한 주택에서 송모(62)씨와 아내 B씨(58)가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두 사람의 장기에서 약물이 검출됐다. 송씨는 한 달 전부터 B씨에게 ‘죽여줄게’ 등 협박성 문자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송씨가 약물로 B씨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고 판단했다. 송씨는 B씨를 상습적으로 때렸다고 한다. 이웃 주민이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B씨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나 송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B씨는 경찰 조사에서 “남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진술했다. 법원도 “구속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은 추가 피해를 우려해 B씨를 쉼터로 보내고 다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 사이 쉼터에서 적응하지 못한 B씨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부부간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다 보면 폭력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피해자, 자녀
부부간 폭력은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에서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된 자녀들은 ‘2차 피해자’다. 어린아이에게 부모 사이의 폭력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정서적 학대’다. 폭력이 일상이 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 불안감을 느끼고 공격적 성향을 갖게 될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2013년에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5.3%가 성장기에 부모 사이의 폭력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부모 사이에 욕설이나 무시 등 심한 말을 한 경우가 40.5%였다. 손이나 물건으로 때리고 다치게 하는 것을 봤다는 대답도 24.8%에 이르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관계자는 “부모 사이의 폭력을 경험한 자녀들이 폭력을 학습하고 내면화해 다시 폭력을 재생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가정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부부간 폭력부터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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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판 이가현 기자 pa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그래픽=안지나 기자
[가족 안의 괴물 <3>] 부부라는 이유로 참고 살다가… 폭력 일상화된다
입력 2016-09-05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