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7849만명의 마음을 훔치다… 전설의 ‘천만영화’ 매력 탐구

입력 2016-09-03 04:00

한동안 부진을 면치 못하던 극장가가 활력을 되찾았다. 1년여 만에 ‘1000만’ 낭보가 들려왔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그 주인공이다. 개봉 19일 만인 지난달 7일 올해 첫 1000만 기록을 세웠고 1일 현재 1147만명을 동원했다. ‘부산행’의 1000만 돌파 가능성은 개봉 전부터 심심찮게 제기됐다. 언제부턴가 ‘1000만’이 흥행 대박의 기준이 된 것이다. 여러 변수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수치다. ‘하늘이 내린 스코어’라고도 한다. 작품성은 기본. 개봉 시기나 경쟁작 상황 등이 모두 고려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관객의 선택이다. 앞서 1000만 기록을 세운 영화들을 살펴보면 각각의 이유가 엿보인다.

#1. 명량(감독 김한민·2014·최종 관객 수 1761만명)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조명한 영화는 12척으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해전에 초점을 맞췄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이들의 숭고함이 진한 감동을 줬다. 최민식을 비롯한 류승룡·조진웅·진구·이정현 등 배우들 열연에 힘을 얻었다. 러닝타임 128분의 절반가량을 차지한 해상 전투신도 긴장감 있게 그려졌다.

#2. 국제시장(감독 윤제균·2014·1425만명) 굴곡진 근현대사를 다루면서 정치적인 해석은 자제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을 내려와 한평생 부산에 터를 잡고 산 덕수(황정민)의 생애를 좇았다. 독일 광부·간호사 파견, 베트남 전쟁 파병, 이산가족 상봉 등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구성에 적절히 활용했다. 우리네 아버지의 희생에 관한 메시지가 중장년층 관객을 움직였다.

#3. 베테랑(감독 류승완·2015·1341만명) 정의로운 형사와 안하무인 재벌의 대립. 흔할지라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다. 적절한 유머와 액션을 버무려 군더더기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유의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재미와 통쾌함을 선사했다. 황정민과 유아인의 연기는 관객의 몰입을 한껏 끌어올렸다.

#4. 괴물(감독 봉준호·2006·1301만명) 한강에 괴물이 산다는 기발한 발상을 통해 우리 사회 이면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권력자들은 무언가를 숨기려 하고 그에 따른 피해는 소시민들이 떠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영화는 재미와 의미를 챙기는 동시에 완성도까지 가져갔다. 우리나라 괴수물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도둑들(감독 최동훈·2012·1298만명) 김윤석·김혜수·이정재·전지현 등 화려한 멀티캐스팅이 완벽한 시너지를 냈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뭉친 4인조 일당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 시원한 유머와 액션이 여름 성수기 관객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다. 오락영화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했다.

#6. 7번방의 선물(감독 이환경·2013·1281만명) 동화적인 설정으로 그려낸 부녀간의 사랑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6살 지능을 가진 정신지체 장애인 용구(류승룡)가 누명을 쓰고 어린 딸(갈소원)과 함께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내용이다. 웃음으로 서서히 쌓은 감정을 후반부에 뭉클하게 터뜨리는 흥행 구조가 제대로 통했다.

#7. 암살(감독 최동훈·2015·1270만명) 친일파 척결을 위해 나선 암살단이 작전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다. ‘도둑들’ 이후 또 한번 멀티캐스팅에 도전한 최동훈 감독이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었다. 전지현·이정재·하정우·조진웅 등이 각자의 역할을 매력적으로 살렸다.

#8.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2012·1231만명) 독보적인 연기력을 지닌 배우 이병헌이 1인2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천민 신분이었던 남자가 왕 행세를 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냈다. ‘백성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현실 적용 가능한 질문을 던져 적잖은 울림을 줬다.

#9.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2005·1230만명)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타 작품들과 차별화된 지점이 있었다. 남사당패 광대들이 주인공이었다. ‘인생이 곧 한바탕 놀이판’이라는 자유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우성(장생 역)의 탄탄한 연기와 이준기(공길 역)의 신선한 마스크가 절묘하게 어울렸다.

#10.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2004·1174만명) 장동건과 원빈. 두 톱배우를 내세워 한국전쟁이 남긴 아픔에 대해 조명했다. 남과 북으로 헤어진 형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는 비극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완성도 있게 담아낸 대규모 전쟁신으로 감정을 극대화했다.

#11. ‘해운대’(감독 윤제균·2009·1145만명) 부산에 대규모 쓰나미가 몰아친다는 설정이 호기심을 유발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엉망진창이 된다. CG가 꽤 볼만했다. 여름 휴가철인 7월 중후반 개봉해 관심을 높인 게 신의 한 수였다.

#12. 변호인(감독 양우석·2013·1137만명) 1980년대 학생과 교사 22명이 불법 감금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염두에 둔 캐릭터가 등장한다. 정치색을 배제하고 인물의 인간적 면모에 집중했으나, 자연스레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주연 송강호의 명연기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13. 실미도(감독 강우석·2003·1108만명) 1970년대 북파를 목적으로 결성된 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스크린에 펼쳐진 어두운 역사의 민낯은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설경구·안성기·허준호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해 작품성도 놓치지 않았다.

영화시장 전체를 놓고 봤을 때 1000만 영화의 등장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대형 기대작과 동시기 개봉하는 경쟁작들은 쓴 한숨을 내쉰다. 쏠림 현상이 발생하는 탓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화의 경우 홍보부터 상영관 잡기까지 어느 것 하나 여의치가 않다고 관계자들은 토로한다.

언론에서는 당연히 주목받는 작품 위주의 보도가 나온다. 화제가 또 화제를 낳으면서 삽시간에 입소문을 타고, 다른 영화들은 그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개봉 첫 주 성적이 좋지 않으면 상영관 수는 줄어든다. 극장은 상업적인 이유로 흥행작에 더 많은 상영관을 배분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이다. 이런 상황에 관객 수가 갑자기 증가할 여지는 많지 않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나날이 심화되지만 누구 하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