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칠 때, 피아니스트의 머릿속은 아주 바쁘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음들을 정확히 짚어가며 미적인 음향을 만들어서 쳐 내야 한다. 어떤 때는 1초에 40개 이상의 음들을 칠 때도 많지만, 대략 1초에 7개음 정도를 친다고 평균 잡았을 때 1분당 420개 음이다. 10분을 연주한다면 4200개 음 정도이고, 30분을 연주한다면 1만2600개이다. 더군다나 리듬과 화음, 그리고 시대적 스타일의 콤비네이션까지 생각한다면, 단 30분의 연주만도 무수한 경우의 수가 나오며 계산으로 해내기도 불가능한 빅데이터 수준의 지적 활동이다.
이렇게 복잡한 작업을 하는 연주라는 일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제대로 듣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느라고 바빠, 듣기의 차원을 지키며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연주자라 할지라도 연습이 부족하면 제대로 듣기는 요원한 일이다.
도대체 들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그리고 왜 많은 음악가들은 듣기의 경지가 그렇게 힘이 드는 걸까. 당연히 ‘듣기’보다는 ‘하기’가 바빠서일 것이다. 우리는 일정 부분 그 ‘하기’에 중독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하기’에만 너무 몰입하는 순간, 그 ‘하기’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그 ‘하기’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 그림을 견지하기가 힘들다. ‘하기’가 충분히 준비되고 ‘듣기’를 통해 예리한 지성과 감성적 논리가 뒷받침 된 연주는, 참으로 단단한 예술 작품이 된다.
나는 피아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행동패턴이나 지성과의 균형, 그리고 신앙의 단면에 대해서 유사성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하기’와 ‘듣기’에 대해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반추해 보게 되었는데, 내게 유년시절부터 습관화된 기도에 관해서였다. 오랫동안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한 신이 원하는 것에 관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기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집중할 때, 짧은 순간의 기도라 할지라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메시지와 영감을 전달받는 경험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게 기도는, ‘자… 이제 신께서 무슨 말씀을 내게 하실까?’라는 기대의 시간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삶은 참으로 정신없다. 제대로 된 투표권을 행사하고, 실수 없이 세금보고를 하고, 가족들과 좋은 관계로 살아갈 수 있는 그저 한명의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내는 것조차 정말 복잡한 일이다. 그 외에 아이들과, 이웃과, 건강과, 개인과 사회의 앞날과, 셀 수도 없는 많은 일들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면 ‘듣기’에 해당하는 총체적 의미와 맥락에 대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기는커녕 이 사회가 엄청난 자력과 자장으로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하기’에 매몰된다. 그 ‘하기’는 블랙홀과도 같은 힘을 가진 듯하다.
‘듣기’를 연습해 보자. 안 하면서 ‘듣기’는 쉬우나, 하면서 ‘듣기’는 마스터의 경지이다. 그러나 삶 자체를 치열한 생존이 아닌 완성하는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연습해볼만한 일이다. 남이나, 언론매체가 전달하는 대세의 경향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내 삶은 무슨 그림을 만들고 있는지, 내 삶의 멘토이자 파트너이신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어떻게 가꾸길 원하는지 찬찬히 들어보자. 임미정<한세대 피아노학과 교수>
[임미정의 삶의 안단테] ‘하기’와 ‘듣기’
입력 2016-09-02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