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배 잃고 손발 묶여… 사실상 ‘퇴출’ 선고

입력 2016-08-31 00:02
채권단이 30일 만장일치로 한진해운에 대한 추가 지원 불가 결정을 내려 한진해운은 사실상 법정관리 수순에 돌입하게 됐다. 이날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뉴시스


한진해운에 대한 채권단의 ‘신규 지원 불가’ 결정은 한진해운 입장에선 해운시장 퇴출 선고나 다름없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현실화하면서 전 세계 주요 항만의 선박 압류, 운송을 맡기는 업체인 화주(貨主)의 대거 이탈, 해운동맹 퇴출, 동맹 선박 사이에 옮겨 싣는 짐인 환적화물의 급감 등으로 국내 해운업계가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장은 연관 사업인 항만업과 조선업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다.

한진해운은 이변이 없는 한 자율협약 종료일인 다음 달 4일 이전에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자율협약 기한이 끝나면 채무상환 유예도 종료되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이 그 사이 법정관리를 피할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진그룹은 추가 자금을 댈 여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각국 항만은 지금까지 밀린 항만이용료, 급유비용 등을 회수하기 위해 선박부터 압류할 공산이 크다. 한진해운은 영업 수단인 배를 잃고 손발이 묶이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항만들은 선박 압류만으로는 손실 보전이 어려워 각종 연체료에 대한 상환 청구 소송을 함께 할 수 있다.

배를 압류당하면 운송 지연에 따른 피해 보상도 감당해야 한다. 한진해운에 물류를 맡기는 화주는 1만6400여곳이다. 이들이 계약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서면 화물가액 기준으로 배상액이 최대 140억 달러(15조652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한국해운물류학회장을 지낸 한종길 성결대 교수는 “한진해운 지원 중단 발표가 나온 만큼 하루이틀 뒤부터 외국 항구에서 선박 압류가 시작될 것”이라며 “한진해운이 정기선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 달도 안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진해운은 화물과 화주도 잃게 된다. 해운사가 법정관리 절차를 밟으면 세계 여러 해운사의 사업 공동체인 해운동맹에서 퇴출된다. 이 경우 환적화물을 공유할 수 없어 배가 남아 있더라도 ‘빈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화주는 배와 네트워크가 사라진 해운사를 찾을 이유가 없어진다. 한 교수는 “이렇게 불안한 회사를 누가 믿고 물건을 맡기겠느냐”고 했다.

따라서 한진해운의 법정관리행이 회생보다 파산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진해운은 이미 구조조정 과정에서 우량 자산을 대부분 매각했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회사를 유지해봐야 손실만 커질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국선주협회 관계자는 “채권단의 지원중단 결정은 한진해운에는 사실상 파산 선고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국내 1위, 세계 7위 규모인 한진해운 해체는 국내 해운업계에 엄청난 파장이 우려된다. 한진해운이 사라지면 국내에 컨테이너 선박 회사는 현대상선만 남는다. 현대상선은 수송 능력이 배 56척에 40만257TEU(1TEU는 약 6m 길이 컨테이너 1개)로 한진해운의 101척, 61만8065TEU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해외 네트워크도 약한 편이다. 이 때문에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후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형 화주가 해외 선사에 일감을 맡기면서 국내 물류의 주도권이 외국에 넘어갈 수도 있다.

한번 잃은 물류 주도권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화주협의회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주도하던 항로를 잃게 되면 외국 선사들이 가격과 물동량 등을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 산업계의 물류비용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형 국적 선사가 사라지면 유사시 군수품과 전략물자, 병력 등을 수송하는 데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해운업계는 1개 원양 물류 노선을 복구하는 데 1조5000억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한다. 박광서 건국대 무역학과 교수는 “한진해운이 청산돼 수십년간 일궈온 해운망이 와해되면 나중에 복원하기 힘들다”고 했다.

한진해운의 물류 업무가 중단되면 세계 3위 항만인 부산항은 환적 물량이 최대 70% 줄어들 수 있다. 당사자인 한진해운을 제외하면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부산항과 유관단체 관계자들은 이날 부산 한진해운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운업의 몰락은 항만업, 조선업 등 관련 해양산업에 도미노처럼 동반 타격을 준다”며 “정부는 채권단에만 미루지 말고 국가 기간산업 붕괴 방지 차원에서 방책을 찾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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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욱 기자 kcw@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