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도 무릉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최고의 비경은 강원도 동해시의 무릉계곡을 꼽을 수 있다. 여행 명소가 많은 동해시에서도 식당에 걸린 풍경사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릉계곡은 두타산(1353m)과 청옥산(1404m) 사이 4㎞ 정도의 깊은 협곡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기골이 장대한 두타산과 청옥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기암괴석과 폭포를 깎아 만들고 여기에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초록빛이 절정을 이루는 여름철 시원한 풍경도 일품이지만 가을철 단풍이 수놓은 계곡·폭포는 한 폭의 산수화로 다가올 듯하다.
동해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계곡 입구에 닿는다. 이곳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 하단까지는 계곡을 낀 숲길로 산책하듯 가볍게 오를 수 있다. 가는 길에 무릉반석과 학소대, 선녀탕 등 변화무쌍한 절경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땀을 별로 흘리지 않고도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신선이 노닐 정도로 천하절경으로 불리는 무릉반석은 금란정 위쪽에서 삼화사 입구까지 4958㎡ 넓이로 퍼져 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하얗고 광활한 바위 옆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도화서 화원들이 봄소풍 나온 장소다. 계곡을 더 올라가지 않고 바위에 앉아 그대로 쉬어도 좋겠지만 발길을 옮기면 또 다른 절경이 기다린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면 병풍바위 등 경탄을 자아내는 기암괴석이 굽어보고 있다.
용추폭포까지 오르는 길은 막판에 약간 가파른 경사 구간이 있지만 대체로 완만한 흙길이다. 비탈길마다 돌계단이 놓이는 등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걷는 재미가 그만이다. 안내문에는 용소폭포까지 왕복 소요시간이 1시간30분 정도라고 적혀 있지만 계곡 풍광에 발길을 멈추다 보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간다.
무릉반석에서 500여m를 들어가면 학소대다. 왼쪽은 벼랑, 오른쪽은 거대한 암벽이 막아선다. 가운데 벼랑에는 4단 폭포가 걸려 있다. 한동안 보고 있노라면 동양화 속의 학들이 노니는 모습이 겹쳐진다.
학소대를 지나 계곡의 막바지에 이르면 두 개의 폭포가 하나의 용소(龍沼)로 떨어지는 쌍폭포가 장쾌하다. 깊은 산속에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다. 오른쪽 폭포는 수직으로 시원하게 물을 내뿜는다. 왼쪽 쌍둥이는 수줍은 듯 계단을 타고 조용히 물을 떨어뜨린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폭포가 앙상블을 이루면서 ‘무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낸다. 감상하기 좋도록 만들어진 나무데크에서 바라보노라면 그대로 눌러앉고 싶어진다. 그 아래에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선녀탕이 자리잡고 있다.
쌍폭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또 하나의 폭포가 반긴다. 용추폭포다. 청옥산부터 갈미봉에 이르는 능선 밑에서 발원해 용이 꿈틀거리며 바위를 뚫고 나온듯한 기암괴석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상중하 3단으로 이뤄진 용소에 차례로 떨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오랜 시간 흐른 물이 화강암을 뚫어 만든 거대한 돌항아리 속에서 휘돌다가 넘쳐흐른다. 폭포에서 뒤돌아보면 ‘발바닥바위’를 품은 거대한 절벽이 내려다본다. 철제 계단을 따라 상단부에 올라 폭포를 보면 바위틈 물줄기를 올라타고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곳을 지나면 두타산과 청옥산 산행으로 이어진다.
비가 와야 장대한 모습을 보이는 폭포도 있다. 관음폭포다. 산책길에서 50m 정도 벗어나 있다. 비가 온 뒤 조금만 발품을 팔면 약 50m 높이에서 여러 계단으로 떨어지는 관음폭포의 위용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평소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거나 말라 있는 경우가 많다. 삼화사 뒤편으로 보이는 널찍한 바위에도 50m 높이의 ‘중대폭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모양의 황홀한 폭포는 비가 그치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춘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에 눈이 호강했으니 이제 사람냄새 나는 마을을 찾아 가슴을 채울 차례다. 태백·사북 일대에서 열차편으로 항만에 부려진 강원도의 석탄을 외지로 실어나르며 한때 동해안 최대의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묵호항을 내려다보는 동문산에 묵호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1963년 세워진 유인등대로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하얀 등대가 맑고 깨끗한 경치를 만든다. 명화 ‘미워도 다시 한번’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이용된 곳으로 연인들이 찾는 로맨틱 포인트다.
그 등대 주변 달동네 마을에는 떠들썩하던 전성기 시절 묵호의 애환과 정취를 들여다볼 수 있는 풍경이 남아있다. 논골마을과 어달리다. 마을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수십 갈래의 골목길에서는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비탈진 사면에 위태롭게 매달린 슬레이트 지붕의 집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뱃일을 나간 가장의 무사한 귀가를 기다리기도 했고, 마당을 덕장삼아 오징어며 명태를 널어 해풍에 말리기도 했다. 지게와 대야에 젖은 오징어나 명태를 가득 지고 가파를 골목길을 오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이 마을에 벽화로 오롯이 남아 있다. 벽화만 봐도 옛 묵호항의 정취와 산동네 마을의 풍경이 또렷하다. 색채나 구도보다는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발길을 붙잡는다. 담 곳곳에는 묵호의 추억을 담은 시들도 곁들여 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작고 허름한 집 사이로 난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이 ‘작품’이 됐다.
여행메모
추암 촛대바위·천곡동굴 등도 볼거리… 동해 대표 음식 곰치국·물회 맛집 즐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릉갈림목에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 망상나들목으로 나간다. 동해·묵호 방면으로 우회전해 7번 국도를 타고 가면 묵호항과 논골마을이 나온다. 무릉계곡은 동해나들목에서 빠지는 것이 좋다.
동해시 풍경사진의 또 하나를 차지하는 곳이 애국가 배경화면의 일출 장면으로 유명한 추암 촛대바위다. 동해시내에서 차로 10여분 달려 추암역 굴다리를 지나면 추암해변이 나온다. 해변 왼쪽 낮은 언덕에 올라서면 바다를 배경으로 불쑥 솟아 있는 바위섬들 사이로 유난히 삐죽 솟은 촛대바위가 보인다. 50여년 만에 군 경계철책이 철거돼 탁 트인 해변을 볼 수 있다.
동해 시내에는 4억∼5억년 전에 생성된 천곡동굴이 있다. 1991년 아파트 건설공사 중에 발견돼 1996년부터 일반에 공개된 천연 석회암동굴이다. 망상해변도 둘러볼 만하다. 끝자리 3일 또는 8일에는 전통 북평5일장이 선다.
동해시에는 동해안 대표하는 음식인 곰치국과 물회 맛집이 많다. 물곰식당(033-535-1866)과 동해바다곰치국(033-532-0265)의 곰치국은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 부흥횟집(033-531-5209)과 신라횟집(033-532-2065)의 물회도 별미다.
천곡동과 망상해변 등지에 관광호텔급 대형 숙소가 몰려 있다. 무릉계곡과 추암 촛대바위에서는 올해 개장한 대명리조트의 ‘쏠비치 호텔&리조트 삼척’이 가깝다.
동해=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