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폭염에 시달리다 훅하고 한 방에 불어오는 찬바람 앞에 채 준비되지 않은 몸도 마음도 휑한 허탈감으로 잠시 우울모드가 동하기도 했다.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아가듯 냉철하게 분석할 필요 없이 그냥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들이 있다. 새로운 계절이, 강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산 위 높이 떠 있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그렇다.
요즘 높아진 하늘을 향해 자꾸 눈길이 간다. 한껏 높이 떠 곱게 열린 청량한 바다 위에 구름 신세계가 떼를 지어 변화무쌍한 모양으로 그려지니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구름일지도 모른다. 어느 종교에서는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아 인생은 뜬구름과 같다고 말하지만, 자기도취에 빠진 듯 꿈덩어리처럼 퍼져가는 가을 하늘의 구름을 보면 허망한 생각보다는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 잠재워진 소망을 끌어올려주는 것만 같다.
가을은 비처럼 그렇게 스며들고 나 또한 차츰 스며들며 두근거리는 이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똑같은 길, 똑같은 숲의 나무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주신 그대로 붉음은 붉음으로, 노랑은 노랑으로 각자의 오색영롱한 옷으로 갈아입고 적당히 우수에 찬 모습으로 맞아줄 때가 기다려진다. 푸르름은 잃었지만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고 처음 자리를 지키며 겸손한 몸짓으로 성숙의 의미를 일깨우며 늙어가는 가을 나무. 쓸쓸함을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운 빛깔로 승화시키는 그들처럼 세상을 곱게 물들일 무엇이 되면 좋으련만.
오만가지 생각 따라 흔들리는 마음의 본질을 만나 머물게 하고 마음이 써지게 하며 미완의 그림조차 완성하고 싶은 계절. 결코 멈추지 않는 시간 따라 이 가을도 오래 기다려 주지 않고 쉬 떠나버릴 것을 알지만, 언젠가 한 점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지게 될 그날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해마다 거저 얻는 이 가을만 제대로 누려도 한 해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가을에는 소중한 값어치가 담겨 있다.
김세원(에세이스트), 그래픽=공희정 기자
[살며 사랑하며-김세원] 가을에 담긴 소중한 값어치
입력 2016-08-30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