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안의 괴물] 도망친 피해자 절반, 경제난·보복공포에 다시 집으로
입력 2016-08-29 19:01 수정 2016-08-30 19:01
지난 24일 서울 중구의 한 고층빌딩에 마련된 가정폭력 긴급피난처. 20대 여성인 박유현(가명)씨는 상담사에게 연신 “감사합니다”며 고개를 숙였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슬리퍼 차림인 박씨는 이날 오후 경찰과 함께 피난처를 찾았다.
황급하게 온 듯 분홍색 핸드백 하나만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상담사가 사다 준 쌀국수로 끼니를 때운 박씨는 상담사와 2시간 남짓 얘기를 나눈 뒤 다른 피난처로 옮겼다.
긴급피난처는 성매매, 성폭력, 가정폭력으로부터 대피한 피해자가 머무는 곳이다. 신변보호를 위해 주소를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서울 중구의 이 피난처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안에 있어 유일하게 위치가 알려져 있다. 여성인권진흥원 관계자는 “이곳은 초기 상담이 주목적이고, 상담 후에 다른 피난처로 가게 된다”고 말했다.
보호시설은 늘었지만
5평 남짓한 공간의 긴급피난처엔 선풍기, 냉장고 정도가 놓여 있다. 세면도구, 이불, 수건과 여성용품, 휠체어도 마련돼 있다. 가정집 살림살이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다급하게 도망쳐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폭력 현장에 경찰이 출동하면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간단한 옷가지라도 챙길 시간을 벌 수 있다. 피난처에 짐을 푼 피해자들은 마음을 추스른 뒤 초기 상담을 받는다. 가정 복귀와 시설 입소 등을 고민하면서 최대 7일까지 머물 수 있다.
박근혜정부 들어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맞춤형 보호시설이 증가했다. 10세 이상 남아 동반 가족보호시설은 2013년 16곳에서 올해 20곳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주거지원시설은 161곳에서 276곳으로, 1366센터 긴급피난처는 17곳에서 18곳으로 확대됐다.
여기에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임시보호소도 있다. 긴급피난처나 보호시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찰서는 가까운 병원의 병실 등을 보호소로 사용한다. 경찰청은 서울에 6곳, 부산에 8곳, 전남에 24곳 등 전국에서 188개 임시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29일 밝혔다.
다만 ‘보호소’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공간도 많다. 일부에선 모텔 등을 임시 보호소로 쓴다. 한 여성보호 전문기관 관계자는 “그런 곳(모텔)에서는 상담이 이뤄지지 않고 피해자 보호도 어렵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도 “임시 보호소의 의미를 넓게 해석해 병원 외 다른 공간을 보호소로 쓰는 경찰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절반은 다시 ‘악몽’ 같은 집으로
보호시설은 늘었지만 절반 가까운 피해자들이 다시 ‘폭력의 지옥’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긴급피난처 입소자 6983명 가운데 1616명(23.1%)은 보호시설로, 290명(4.2%)는 전문 상담기관으로, 1084명은 연고자에게 보내졌다. 가장 많은 3372명(48.3%)는 귀가를 택했다.
왜 이들은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귀가자가 많은 것은 피해자 분리 대책이 안고 있는 근본적 한계 때문이다. 가해자의 추적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립이 쉽지 않다. 번듯한 서류를 내야 하거나 4대 보험에 들어야 하는 직장은 꺼리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피해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리게 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아이와 함께 머무는 시설에서도 오래 있기 어렵다. 학교 문제 등이 걸림돌이 되는 일이 잦다. 예를 들어 보호시설이 있는 동네 인근 중학교에 빈자리가 없으면 중학생 자녀를 둔 피해자는 이 시설에 입소할 수 없다. 여러 가족이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또래끼리 싸워 강제 퇴거당하는 일도 있다.
전문가들은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피해자 자녀의 입학과 전학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보호시설이 피해자 보호라는 본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경찰이 운영하고 있는 임시 보호소도 개선해야 한다. 여성보호 전문기관의 한 상담사는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상담과 보호는 전문기관에 맡겨줬으면 한다”며 “역할 분담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임주언 기자 eo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