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재찬] 공정위 패소율에 대한 단상

입력 2016-08-29 18:40

손자병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잘 알려진 병법서다. 손자병법 제3편 모공편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로 친다. 이를 부전승(不戰勝)이라고 하는데 부전승이 백전백승(百戰百勝)보다도 낫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 자주 거론 되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높은 소송 패소율이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면 공정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소송에서 패하면 이미 낸 과징금에 이자까지 붙여 돌려줘야 하고 공정위에 대한 국민 신뢰가 떨어지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승소율 100%를 달성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소송에서의 백전백승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길 싸움만 하면 된다. 소송에서 질 것 같으면 아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면 된다. 예를 들어 정황상 담합이 분명해도 합의서 등 직접증거가 없어 소송에서 이길 확률이 60∼70%에 그친다고 판단될 경우 아무런 처분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물론 행정권을 남용해선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때로는 적극적인 행정을 해야 할 상황이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행정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패소가 두려워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위법행위로 발생하는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더욱이 사소(私訴)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 같은 현실에서는 패소가 두려워 집행을 꺼리게 되면 과소집행(false negative)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패소율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패소가 두려워 소극적인 행정을 한다면 이득을 보는 쪽은 위법을 자행한 사업자이고 피해를 보는 쪽은 소비자인 국민이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업자로서는 공정위의 패소율을 부각시켜 공정위로 하여금 소극 행정을 펴게 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 되는 셈이다.

최근 공정위는 영국의 글로벌 경쟁법 전문저널 GCR(Global Competition Review)로부터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GCR은 매년 세계 경쟁 당국을 평가해 순위를 매긴다. 우리보다 앞서 경쟁법을 도입한 일본조차도 지금까지 최우수 등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금년에 최우수 등급을 받은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독일 프랑스 등 4개국뿐이다.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이렇게 공정위가 최우수 등급을 받은 데는 지적재산권 분야에서의 법집행 실적이나 절차적 공정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있으나 공정위의 높은 승소율도 한몫했다.

2015년 공정위의 승소율(일부승소 포함)은 88%로 58%인 유럽연합(EU)보다 훨씬 높고 다른 경쟁 당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세계적으로 승소율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얘기다. 특히 경쟁법은 민법이나 형법과는 달리 역사가 훨씬 짧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요즘 사업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교묘해졌다. 법을 위반해도 직접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공정위는 조사·심결·소송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패소방지 종합대책을 마련한 바 있다. 아울러 사업자의 절차적 방어권을 보장하고,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사건 처리 절차 개혁방안인 ‘사건처리 3.0’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