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희상 <4> 밤마다 나이트클럽 전전 돈 탕진… 주먹질까지

입력 2016-08-29 17:56
지인들과 그룹사운드를 조직해 음악 활동을 하던 때인 20대 중반의 윤희상 집사(뒷줄 왼쪽 두 번째).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왔지만 화려한 밤 문화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고고클럽’(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가수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 하고 서울에 온지 6개월 만에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낙향했다.

20세 가을 고향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는 한창 김장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오메 내 새끼”하며 고춧가루가 묻은 팔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왔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어머니 마음도 모르고 서울에서 산 좋은 옷에 김치 양념이 묻은 게 싫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고고클럽이 생각나고 명동에 있는 음악다방,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들의 모습들이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만 밀어주시면 꼭 훌륭한 가수가 되어 돌아올게요.”

당시 우리 집은 선창가에 상가 한 채와 안집 두 채를 갖고 있었다. 상가 한 채와 집 한 채를 팔아 나를 지원하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마지막 돈을 받아 상경할 때 어머니께서 기차역까지 배웅 나오셔서 손가락에 꼈던 금가락지를 빼주시며 “돈이 다 떨어지면 비상금으로 팔아 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금가락지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의 금가락지까지 팔아먹은 나는 더 이상 고향에 갈 면목이 없었다. 돈이 없어 수없이 굶었고 버스비가 없어 걸어 다녔다. 비가 오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했고 추운 겨울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집 굴뚝을 끌어안고 잔적이 많았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갈 수 없었던 것은 빈손으로 내려가기엔 너무나도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할 일 없이 뒷골목을 헤매다 폭력 사건에 휘말렸고 서울 강북성심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가수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졌다.

평소 친분 있던 가수 박건씨로부터 작곡가 임종수씨를 소개받아 청계천8가에 있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다 임씨와 콤비인 작사·작곡가 조은파씨를 소개 받고 그의 밑에서 가수 지망생 생활을 했다. 조씨가 기획실장으로 있는 대성음반 출장소에서 숙식을 했다. 난방이 안 되는 차가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잤다. 조씨는 나를 가수로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대성음반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다.

당시 피아노로 레슨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다른 가수에게 녹음시킬 반주음악을 전달 받아 연습을 했다. 그때 받은 곡이 ‘칠갑산’ ‘오지 마세요’라는 두개의 신곡이었다. 그 곡을 가지고 1년 넘게 밤낮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나서야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한 가수가 녹음을 일찍 마쳐 30분이 남았다며 조씨가 나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권했다.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30분 만에 두 곡의 녹음을 거뜬히 끝낼 수 있었다. 녹음된 곡을 두 곳의 음반회사에 보냈고 모두 음반 제작을 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드디어 1979년 신곡 몇 곡을 추가해 대성음반에서 ‘칠갑산’을 타이틀로 한 1집을 발표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