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직장 성폭력, 피해자만 두 번 눈물

입력 2016-08-29 00:16

“누가 신고했는지 다 알고 있다.”

직장 상사의 성추행을 신고하자 돌아온 건 소속 부서 팀장의 엄포였다. 앞장서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사내 윤리팀은 되레 “해당 상사가 해고당하길 원하느냐”며 부담을 줬다.

지난 4월 한 대기업의 여직원 7명은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일삼은 상사 A씨를 윤리팀에 신고했다. 그는 회식 때마다 여직원들의 허벅지나 머리를 만졌다. 등을 쓰다듬으며 브래지어 끈을 건드렸다.

회사 측 대응은 안이했다. 회사 밖이 아닌 사내 회의실에서 피해자들을 면담했다. 누가 A씨를 신고했는지 뻔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2주간의 면담이 끝난 뒤 윤리팀은 ‘사과회’라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과회는 정작 피해자에겐 가시방석이었다. 공개적으로 팀원을 모두 모은 뒤 A씨가 앞에 나가 사과하는 자리인 데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A씨는 감봉 3개월, 정직 1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신고했던 한 여직원은 “솜방망이 처벌에다 이렇게 눈칫밥을 먹어야 할 줄 알았더라면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회사 측은 “해당 처분은 추후 승진이 어려운 ‘중징계’에 해당한다”며 조사 과정에서 최대한 공정성을 지키려했다고 설명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두 번 울고 있다. 경직된 조직문화와 따가운 주변 시선은 오히려 피해자를 질책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7월 직장 여성 4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희롱 피해를 입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0.2%나 됐다고 28일 밝혔다.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이유로는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된다’(51.0%)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고용상 불이익이 우려된다’는 대답도 36.0%를 차지했다.

실제로 성희롱 피해자가 오히려 회사를 떠나는 사례는 많다. 20대 여성 B씨는 지난 5월 회사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야한 농담을 건네자 B씨는 사과를 요구했다. 돌아온 것은 ‘친해지려고 놀다가 그런 건데’라는 변명이었다. 이 일이 공론화되자 회사는 가해자에게 감봉처분을 내렸다.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은 한 달 후 ‘인턴평가’에서 엉뚱한 결말을 낳았다. 회사 측은 B씨에게 “같이 근무하기 어려우니 다른 회사를 알아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B씨의 근로계약서 어디에도 ‘인턴’이란 단어는 없었다. 동료 직원조차 “대학에 재학 중인 인턴은 따로 있다”고 어리둥절해했다. 회사 측은 “(B씨가) 사실상 인턴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회사의 통보를 ‘사실상 해고’로 받아들인 B씨는 온라인에 ‘억울하다’는 글을 올렸다. 논란이 일고 정상적인 업무가 어려워지자 회사 측은 B씨를 대기발령 조치했다.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던 B씨는 지난 6월 사직서를 냈다. 회사 측은 “성추행 사건과 무관한 평가였고 해고도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피해자가 압박과 고용 불이익에 시달리는 것은 법체계가 엉성하기 때문이다.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이 만들어졌지만 현실과 거리감이 있다. 법에선 회사가 성희롱 피해자에 불리한 조치를 내릴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다.

여기에다 피해자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직장문화도 문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직장에서 피해 여성이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피해 호소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가해자를 보호하려 드는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임주언 이가현 기자 eo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