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33·한화 이글스)은 말이 없다. 한번 마운드에 오르면 감독의 교체 지시를 받을 때까지 묵묵하게 던진다. 이닝이 넘어가고, 투구 수가 늘어나도 불평 한마디 하는 법이 없다. 누군가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괜찮다”고 말한다. 몸에 이상이 생길 때까지 ‘쉬고 싶다’고 먼저 말한 적도 없다. 조용하고 꾸준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근면왕’이다.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 누구보다 성실하게 재활해 가장 먼저 복귀한다. 자신의 어깨를 믿었고, 많이 던지길 원했다. 권혁이 12년간 활약했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2015년 한화 이글스로 옮긴 이유는 벤치에 앉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였다. 프로야구에서 하루를 멀다하고 선수의 일탈로 인한 사건사고가 불거졌지만 권혁은 14년째 마운드를 밟으면서 시끄러운 잡음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권혁은 그런 선수다.
권혁이 쓰러졌다. 지난 24일 팔꿈치 통증을 느끼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한화로 이적하고 처음이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정밀검사에서 팔꿈치 염증 수준의 진단을 받았다. 권혁은 하루 만에 한화의 재활군으로 들어가 복귀준비를 시작했다. 정규리그 종료를 한 달여 앞두고 가장 중요한 불펜의 전력 이탈로 가을야구 진출의 실낱같은 희망을 날릴 뻔했던 한화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권혁의 1군 말소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화를 2년째 지휘하는 김성근(74) 감독의 ‘혹사야구’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이런 논란은 그동안 여러 차례 불거졌지만 철완(鐵腕)과 같았던 권혁이 쓰러지면서 김 감독의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권혁은 김 감독으로부터 가장 많은 부름을 받은 불펜이다. 권혁은 마지막 등판이었던 지난 21일 kt 위즈 원정경기(12대 6 승)까지 66경기를 소화했다. 당일을 기준으로 올 시즌 10개 구단 선발과 불펜을 통틀어 최다 등판이다. 선발투수가 불펜이나 마무리투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이닝 수에서도 권혁은 95⅓이닝으로 30위권 안에 있다.
지난해까지 포함하면 한화의 255경기 중 144경기(207⅓이닝)를 소화했다. 출석률은 무려 56.4%다. 단순히 비율만 놓고 보면 이틀에 한 번은 반드시 나왔고, 하루 만에 등판한 적도 있는 셈이다. 권혁은 삼성에서 한 시즌 동안 50경기 안팎을 등판했고, 평균 48⅓이닝을 던졌다. 최다 등판은 2012년의 64경기다. 올 시즌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지만 삼성 시절 최다 등판을 넘어섰다. 평균 이닝은 2배 이상으로 늘었다.
김 감독의 혹사야구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SK 와이번스를 지휘했던 2007∼2011년에도 ‘벌떼 마운드’를 운영하면서 투수들의 투구수를 높였다. 당시의 SK보다 선발진이 취약한 한화에선 불펜이 시달렸다. 올 시즌 등판한 경기 수에서 권혁 송창식(31) 박정진(40) 등 한화 불펜진이 4위 안에 포진한 이유다.
타자들은 경기에서 패배하면 자정 전후까지 남아 배팅훈련을 실시한다. 이른바 ‘특타’로 불리는 김 감독만의 훈련법이다.
선발진도 예외는 아니다. 한화의 선발진을 앞으로 강화할 ‘영건’으로 기대를 받았던 김민우(21), 선발과 불펜을 오갔던 장민재(26)의 부상은 과도한 훈련과 늘어난 투구 수 때문에 부상을 당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사 기준이 뭐냐”며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하는 김 감독의 태도 역시 논란을 부추기는 요소다. 한동안 입을 닫았던 그는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자, 지난 25일 홈구장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기자들을 만나 1시간 가까이 자신의 야구철학을 설명했다. 선수의 투혼과 기본기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상은 좋지 않은 투구자세 때문”이라거나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이 있다”며 선수 탓만 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야구계 안팎에선 ‘김성근 야구’에 대해 “선수 생명을 잡아먹는 감독”이란 비판이 다시 제기된다. 성과를 위한 가혹한 훈련과 출전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감독 출신의 한 원로는 “야구의 본질을 알고 즐길 수 있는 선수를 육성해야 한다”며 “박병호 김현수와 같은 선수가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야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훈련의 강도를 높이고 반복하는 횟수를 늘려 성공하긴 어렵다”고 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혹사야구에 헉! 헉!… ‘근면왕’ 권혁이 쓰러졌다
입력 2016-08-27 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