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희상 <2> 여섯 살부터 어머니가 부르던 유행가 따라 불러

입력 2016-08-25 18:51 수정 2016-08-25 20:51
윤희상 집사는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해준 고향 어른들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 대표곡 ‘카스바의 여인’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윤 집사.

1955년 전남 완도군 청산면에서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외로운 섬마을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농사하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업고 살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힘들었을 텐데 그땐 이 모든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우리 집은 비교적 형편이 나았다. 전남 목포시, 완도군 등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멋 내는 것을 좋아하고 흥이 많은 분이셨다. 지금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건 하나를 어깨에 이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그 물건은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처음 본 동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아이들은 집 앞까지 졸졸 따라왔다. 그때부터 라디오는 내 친구가 됐다.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노래를 좋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두 분은 노래를 잘 부르셨다. 특히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으셨다. 어머니가 창과 민요를 즐겨 불렀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노래를 하나씩 따라 불렀다. 어린 아이가 동요가 아닌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동네 어른들은 나만 보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면 고구마나 사탕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어른들이 “잘 한다”고 박수쳐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동네 어른들이 가수의 꿈을 심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청산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았다. 반에서 유일한 공무원 아들이라 주목을 받았다. 공부를 잘해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은 판사나 검사가 될 재목이라며 큰 기대를 하셨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엔 여전히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포로 이사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선 섬보다 도시가 낫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정에 말 못할 아픔도 있었다. 인물 좋고 성격이 호탕했던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당시 목포에 따로 살림을 차린 것이다. 화가 난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때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로 마음을 잡고 가정에 충실하셨다.

목포로 이사 온 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물자가 부족한 시골에서 살다 도시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전학 간 학교에선 친구들이 나를 ‘섬 놈’이라고 놀리며 왕따를 시켰다. 시골에서 순박한 친구들과 어울렸던 나는 이런 상황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친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못살게 굴고 때렸다. 처음엔 맞다가 이에 굴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매일 주먹질을 해 입술이 찢어지고 눈이 부어있는 날이 많았다.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하교 길에 짝사랑한 여학생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집을 지나갈 때면 여학생이 내 목소리를 듣도록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불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과 많이 싸우는 상황에서도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