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묻지마 살인? 사회 향한 '분노 살인'이다

입력 2016-08-25 21:11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
죽음의 스펙터클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라고 부른다. 근래 사용빈도가 늘고 있다. 대개 미친놈이 격분해서 저지른 살인극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에 정신질환, 사이코패스, 게임이나 포르노 중독, 가족 붕괴 등의 이유가 곁들여 지기도 한다.

지난 5월 강남역에서 한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의 경우엔 논의구도가 좀 달랐다. 한 쪽에서는 의례 그랬듯이 정신질환 문제로 정리하고자 했으나, 다른 한 쪽에서 여성혐오가 원인이라는 주장을 폈다.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혐오 살인’이라는 것이다. ‘묻지마 살인’의 배후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시대와 사회는 자살이나 살인, 범죄 등에 영향을 미친다. 2000년대 들어 어느 나라라고 할 것도 없이 다중살인 사건이 늘고 자살률이 증가했다. 이게 우연일까?

미국 저널리스트 마크 에임스의 책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후마니타스)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회사 내 총격 사건들을 분석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사례가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는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저자는 레이거노믹스 이후 가혹해진 직장 환경이 노동자들에게 가한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 직장 내 총격 사건의 증가와 노동조건의 변화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직장 내 대량 학살의 원조는 1986년 우체부 패트릭 셰릴의 우체국 총기 난사 사건이다. 1998년에 미국의 직장 내 분노 살인이 9건 보고 됐는데, 2003년에는 45건에 사망자 69명, 부상자가 46명이었다. 저자는 “한때 기업은 직업과 그 가족들에게 안정을 선물했지만, 레이건 정권하에서 기업은 두려움을 양산하는 스트레스 엔진으로 변형됐다”고 말한다.

25년간 일한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뒤 회사로 찾아가 학살극을 벌인 로버트 맥의 경우를 보자. 그는 해고 통보를 받은 후 닷새가 넘도록 집에 혼자 있었다. 그는 낙담한 상태였고 겁에 질려 있었다. 잔혹한 계약 종료 통보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는 마침내 “제 자신을 종료할 때가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38구경 리볼버를 한 정 구입한다.

이 책은 회사가 분노 살인의 목표물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와 장시간노동, 구조조정의 불안감, 일터 괴롭힘 등으로 채워진 미국의 직장 문화가 직장인들에게 자살과 복수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죽음의 스펙터클’(반비) 역시 무차별 다중살인 사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그 이유들을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서 찾고자 한다. 특히 양극화를 불러온 금융자본주의와 냉혈함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동시대인들의 정신에 가한 충격을 ‘정신적 변이’라는 말로 정리하면서 이를 자살과 다중살인의 배경으로 주목한다.

이탈리아의 미디어 사회학자인 저자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의 얘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자본주의를 절대시하는 분위기와 저항이 불가능해진 조건에서 불행이라는 풍토병이 지구에 확산되고 있고,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자살 충동에 휩싸여 있다.

그에 따르면 ‘묻지마 살인’ 역시 자살적 측면이 강하다. 자신이 처한 지옥에서 자살을 통해 탈출하기 위해 ‘자살적 살인’으로 다중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스펙터클’이라는 문화적 요인이 개입한다. 삶의 고통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은 인터넷 속에서 가상화된 삶을 살면서 스펙터클한 것에 열광한다. 총기 난사가 일부에게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두 책은 자살과 ‘묻지마 살인’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온 우리 사회의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이 사회와 시대가 개인들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압력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괴물들’의 출현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