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골프 최종 4라운드가 열린 지난 20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 골프코스. 박인비(28)가 5번홀(파5)에서 3번째 샷을 남겨 놓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한 코스에는 강풍이 불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바지나 치마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야디지북(yardage book)’을 꺼내 보고 있었다. 야디지북은 골프코스의 지형을 세세하게 그려놓고 어떤 지점에 어떤 잔디가, 어떤 경사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선수에겐 필수 길라잡이인 셈이다.
그러나 박인비는 ‘천하태평’처럼 보였다. 야디지북은 박인비가 아니라 캐디 브래드 비처(34·호주)가 봤다. 그리고 비처는 박인비에게 말을 건넸다. 박인비는 비처가 꺼네준 아이언을 들고 거침없는 샷을 날렸다. 박인비는 이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야디지북을 보지 않는 골퍼! 남녀 통틀어 프로골프계에서 박인비는 거의 유일한 선수다. 기록된 정보보다 캐디가 판단한 정보를 더 믿는다. 100% 신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비처는 박인비에게 그런 남자다.
비처는 2007년 박인비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 데뷔할 때부터 캐디였다. 선배였던 강수연 정일미의 골프백을 멨던 그를 소개받은 뒤 지금까지 모든 대회에 함께 했다. 여자골프계에서 두 사람 만큼 오랜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선수와 캐디는 없다.
남자골프와 달리 여자골프에서 캐디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샷을 할 때 선수의 어드레스 방향을 봐줘야 하고, 그린에서는 퍼팅라이까지 판단해줄 줄 알아야 ‘능력자’소리를 듣는다. 이걸 잘 못하는 캐디는 가차없이 고용주인 선수에 의해 해고된다. 유독 여자골프에서 캐디를 교체하는 비율이 높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캐디의 간섭이 지나치고, 캐디에 의존하는 선수가 많기 때문에 여자골프는 항상 ‘늑장 플레이’ 비난을 받는다.
이런 여자골프계에서 박인비와 비처의 관계는 정말 독특한 셈이다. 비처가 박인비의 어드레스를 봐주거나, 퍼팅라이를 알려주는 일은 전혀 없다. 박인비는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스스로 퍼팅 라인을 머릿속에 그려 샷을 한다. 비처의 일은 그녀를 북돋우고, 친구처럼 말을 걸고, 어프로치샷을 할 때 거리를 알려주며, 바람과 지형을 판단해 가장 적절한 골프클럽을 권하는 일이다. 횟수로 10년 동안 두 사람의 ‘루틴’은 바뀐 적이 없다. 여자 프로선수들을 향해 “플레이어가 아니라 ‘캐디의 아기들’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남자 프로선수들도 박인비 앞에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든다.
‘그림자 남자’, 비처는 그렇게 박인비와 지금껏 LPGA 무대를 평정해왔다. 2014년 1월 박인비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전지훈련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때 비처는 자신의 고향인 호주 골드코스트를 권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숙소로 내놨다. 박인비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비처는 ‘주인’이 도착하기 전 골드코스트의 골프장을 전부 답사해 5군데의 훈련지를 선정했다. 물론 코스 선정 이유와 온갖 지형지물, 거리, 바람 등을 전부 설명해줬다.
한 해 전 4월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전통에 따라 호수에 뛰어들 때도 박인비가 남편 남기협 스윙코치보다 더 옆에 뒀던 사람이 바로 비처였다. 지난 6월 10일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에 참가해 LPGA 명예의 전당 헌액 요건을 갖췄을 때 비처는 박인비에게 “그냥 이 순간을 즐기라”고 했다. 절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캐디와 선수의 형식적 관계에서는 건넬 수 없는 말이다.
“단순한 캐디가 아닙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고, LPGA 무대에서 내내 제 곁을 지킨 사람입니다.”
박인비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 기자회견에서 맨 먼저 비처를 언급했다. 그리곤 “언제나 최악의 샷을 하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제가 의심에 빠져 어떤 샷을 쳐야할지 모를 때, 저는 비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했다. 박인비는 “남편과 부모까지 내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비처만큼은 늘 내 편 이었다. 나는 비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비처는 “박인비는 내 상사”라고 생뚱맞은 대답을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 맘으로는 항상 여동생처럼 생각한다”고 웃었다. 비처는 2014년 2월 LPGA가 수여하는 ‘올해의 캐디’상을 받았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퀸 인비 옆의 ‘그림자 캐디’
입력 2016-08-25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