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뙤약볕에 초록의 모가 무릎보다 더 자랐다. 논을 끼고 돌아가니 대문도 달지 않은 주황색 양철지붕 집이 나온다. 입구 의자 위에 ‘베짱이 농부네’라고 쓰인 나무 간판을 비스듬히 걸어둔 걸 빼면 여느 농가와 달라 보이지 않는 소박한 집이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만안리 4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농촌 마을에 갤러리가 생겼다. 지난 16일 오후 그곳을 찾았다.
갤러리 주인인 전병오(46) 정수연(47) 부부가 막 수확한 큼지막한 누런 호박을 트럭에서 한창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갤러리 주인이란 느낌이 안 나요. SNS 등을 통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밖에서 기척을 내면 새삼 실감이 나더라고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아내 정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 5월 중순 ‘베짱이농부네 예술창고’ 오픈 이후 주말에는 70명 이상이 다녀간단다. 지역아동센터 꼬마 단체 손님부터 전국의 미대생까지 다양하다. 화가가 꿈이었다는 인근 마을 농사꾼 아내도 찾아왔다. 마루에 걸린 ‘고라니가 키우는 콩밭전’ 전시포스터가 근사하다. 농기구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뿐 아니라 포스터 아래 마루와 작은 방에도 작품이 놓여있다.
이 농가 갤러리는 해남에 기반을 둔 행촌문화재단(이사장 김동국·해남종합병원장)이 생활공간 속 예술을 기치로 내걸며 이 부부에게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시골 농부도 향유할 수 있는 갤러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 전시는 아내 정씨와 중견 작가 박미화(59)씨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시를 쓰는 정씨가 쑥스럽게 내밀었던 습작 시에서 제목을 땄다. 박 작가는 이 시를 모티브로 회화, 조각, 설치 등 20여점을 제작해 선보였다. 박 작가는 서울대 도예과 졸업 후 미국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했다.
추상화처럼 난해한 게 아니라 밭에서 보는 고라니 등 일상 풍경을 담은 작품에 끌렸을까. 미술관 구경 한 번 못해 본 사람이 태반인 농촌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개막일에 6점 정도를 남기고 모두 팔린 것이다. 지역민 경제 사정을 고려해 50만원 이하로 가격을 매겼더니 너도나도 생애 첫 컬렉터가 됐다. “엄마, 나 저 그림 살래. 맡겨둔 세뱃돈 12만원 주세요.” 초등 4학년 혜인이는 개막 전날에 엄마와 구경하러 왔다가 첫 손님이 됐다. 개막일에는 마을 주민뿐 아니라 인근 목포, 완도 등지에서도 손님이 오며 2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귀농 10년차인 정씨 부부는 서울에서 연극을 했다. 독립연극을 해서 먹고살기는 쉽지 않았고, 결혼 1년 만에 귀농을 결심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는 농사일이지만 이제는 쌀과 호박, 홍아씨 등 특용작물 재배로 연 1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남편 전씨는 “아이들 농가체험 민박을 하고 있는데 이걸 매개로 탄력이 생길 것 같다. 갤러리를 열어 문화적 체험까지 제공할 수 있으니…”라며 싱글거렸다. 농사일로 집을 비울 수 있는데, 그림 도난 걱정은 없을까. “마을 사람들이 지켜주지요. 낯선 사람이 오면 눈에 띄거든요.” 마침 집집마다 “꼬끼오”하는 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9월 30일까지(010-4915-8030).
해남=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베짱이농부네 예술창고 구경 오랑께요”
입력 2016-08-24 00:02